◇김용담 전 법원행정처장(왼쪽)과 박일환 현 법원행정처장
법원행정처장이란 자리가 있다. 우리나라 사법행정 최고 사령탑인 법원행정처의 장(長)으로 장관급 예우를 받는다. 굳이 비교하면 정부의 행정안전부 장관, 국회의 국회사무총장이 그에 해당한다. 법원행정처장은 대법원장 지휘 아래 전국 법원의 인사와 예산을 총괄하고 사법정책을 좌지우지한다. 하지만 이처럼 막강한 권한과 달리 일반 대중에겐 아주 낯선 존재다. 법원행정처장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이가 많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대법관이 돌아가며 겸임하는 자리인 탓이 크다. 꼭 법원행정처장이 되야겠다고 애쓰지 않아도 누구든 일단 대법관에 임명되면 자연스럽게 겸직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법원행정처장이 뭐 그리 대단한 자리겠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김용담 법원행정처장은 올 한해 사법부 수장인 이용훈 대법원장 못지 않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법원행정처장이 이렇게 취재진 이목을 집중시킨 건 1949년 법원행정처 발족 이후 처음 있는 일 같다.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 논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법원은 김 처장을 ‘촛불재판’ 개입 의혹 규명을 위한 진상조사단장에 임명했고, ‘최고참’ 대법관인 그는 갓 대법원에 입성한 ‘막내’ 신 대법관을 상대로 직접 조사를 벌이는 사법사상 유례가 없는 광경을 연출했다. “신 대법관이 법원장 시절 재판에 개입했다”는 진상조사 발표로도 파문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소장 판사들은 법원별로 판사회의를 열어 신 대법관 퇴진을 우회적으로 촉구했다. 법관들의 집단행동 움직임을 무마하고 제도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도 김 처장 몫이었다. 논란이 계속되는 동안 기자들은 김 처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했다. ‘촛불재판’ 개입 논란이 불거진 3월부터 신 대법관의 거취가 ‘유임’ 쪽으로 가닥이 잡힌 5월까지 김 처장의 행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김용담 법원행정처장은 2003년 9월 광주고등법원장에서 대법관으로 발탁됐다. 최종영 당시 대법원장이 그를 대법관 후보로 제청한 것은 기수, 서열을 중시하는 법원 인사관행에 따른 결과였다. 이에 반발한 젊은 법관들이 이른바 ‘4차 사법파동’을 일으켰지만 파국으로 치닫진 않았고, 김 처장은 무사히 대법원에 입성했다. 그가 법원행정처장을 겸한 것은 지난해 1월부터 최근까지 약 1년5개월 동안이다. 최근 “대법관 퇴임 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 활동을 할 계획인데, 법원행정처장을 계속 맡고 있으면 준비가 어렵다”며 겸직을 그만뒀다. 법원행정처장은 판사이면서도 재판은 전혀 못하고 괜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같은 곳에나 불려가 의원들 추궁에 쩔쩔매는 자리다. 따라서 법원행정처장을 겸하는 대법관은 임기만료 전 느긋한 시간을 갖기 위해 처장 자리를 내놓는 게 법원의 오랜 관행이다. ‘촛불재판’ 개입 논란을 수습하느라 대법관 임기 말년을 힘겹게 보낸 김 처장은 역대 어느 법원행정처장보다 홀가분했을 것이다.
법원행정처장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대법관이 이를 겸직하는 관행은 1980년대 들어 생겨났다. 서울고법 부장판사,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변정수 변호사는 “대법관보다 낮은 대접을 받는 현실에 분개한 당시의 법원행정처장이 군사정권을 상대로 열심히 ‘운동’을 하더니 결국 스스로 대법관이 돼버렸다”고 기억한다. 이후 대법관들이 돌아가며 1∼2년씩 법원행정처를 이끄는 게 불문율로 굳어졌다. 문제는 법원행정처장이 사법부에서 대법원장 다음가는 일종의 ‘부(副)대법원장’처럼 돼버렸다는 점이다. 대법관을 겸하는 법원행정처장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법원행정처 문턱도 높아졌다. 법원행정처가 대법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전국 법원의 판사와 직원들 위에 ‘군림’하는 기관으로 변질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2005년 취임 직후 ‘사법개혁’의 명분을 내걸고 법원조직법을 고쳐 대법관이 법원행정처장을 겸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대법원장 역시 ‘강력한’ 법원행정처가 갖는 장점을 마냥 외면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2007년 12월 대법관은 대법관이 법원행정처장을 겸하는 옛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김용담 대법관이 내놓은 법원행정처장 자리는 후배인 박일환 대법관에게 돌아갔다. 박 신임 처장의 어깨 위엔 ‘촛불재판’ 개입 논란 같은 것이 다시는 사법부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제도 개선을 완성해야 할 임무가 지워져 있다. 그는 또 법원 내 ‘권력기관’으로 변해버린 법원행정처의 위상 재조정이란 과제도 안고 있다. 박 처장은 본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는지 취임사에서 법원행정처 구성원들에게 목에 힘주지 말 것을 주문했다. “각급 법원 법관과 직원들이 바라보는 법원행정처는 우리가 생각하는 법원행정처의 모습과 사뭇 다를지도 모릅니다. 법원행정처는 각급 법원에서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과 국민이 만족할 수 있는 민원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지원하는 곳입니다.” 법원행정처가 법원의 ‘주인’이 아니고 일선 법관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머슴’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언제부턴가 우리 법원에선 재판 잘 하는 판사보다 사법행정 수완이 뛰어난 판사가 더 인정받고 출세도 잘 하는 풍토가 조성됐다. 법원행정처 간부들 중엔 전체 법관 경력의 3분의 1 이상, 심지어 절반 가량을 법정 대신 결재서류가 가득 쌓인 사무실에서 보낸 이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새 법원행정처장 아래에서 과연 ‘재판>사법행정’의 구조가 정착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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