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노잣돈 - 세계일보 블로그
 
     1973년 발행된 오백원짜리 지폐랍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이순
    신 장군의 높은 기개와 거북선의 위용이 살아 숨쉬는 것 같지 않나요?


  이순신은 어린시절에 무척 가난하게 살았어요.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해서 겨우 끼니를 이어갈 정도였죠.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자 이순신의 가족은 서울에서 외갓집이 있는 시골로 이사를 갔어요. 이순신은 가난 속에서 자랐지만 구김살이 없었고 남을 돕는 일에는 앞장섰어요.  길을 가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그냥 벗어주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원균의 모함으로 관직을 빼앗기고 백의종군길에 오를 때의 일이었어요.  모진 옥살이로 몸이 많이 상했지만 장군은 곧장 전쟁터로 달려갔습니다. 일본 왜구들을 한시바삐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1597년 4월 경상도 운봉에 닿은 그는 예전에 알고 지내던 박롱의 집에 잠시 여장을 풀었죠. 바깥에선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오랜만에 만났으나 서로의 입장이 난처했어요. 박롱의 형편이 가난해 손님을 대접할 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순신은 박롱의 딱한 표정을 읽고 갖고 온 쌀로 밥을 짓게 했어요.  


 박롱의 집안은 원래 만석지기 부농이었습니다.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번번이 과거시험에 낙방하자 투전판과 기생집을 돌며 가산을 탕진했어요. 견디다 못한 부인이 자식들을 데리고 그의 곁을 떠나버렸답니다.  박롱과 밥상을 마주한 이순신은 그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일렀습니다.


  “명문 귀족의 가문은 그들의 조상이 충효와 근검한 생활로 이룬 것이고 쇄락한 집안은 그 자손들이 사치하고 오만해서 그리된 것이야. 명문이 되기는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려우나 가문이 망하기는 터럭 태우듯 쉬운 일이네.”

 그런 후 이순신은 백의종군 도중에 주변 사람들이 마련해준 노자돈을 박롱에게 모두 내놓았어요.

 “부디, 처자식을 찾아서 근검절약해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나.”


 이순신 장군이 떠난 후 박롱은 아내와 자식을 찾아 그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새 사람이 된 박롱은 부지런한 생활로 다시 재산을 모아 큰 부자가 되었어요. 그들은 예전처럼 배불리 먹지 않고 사치하지도 않았어요. 동네 노인들을 공경해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답니다. 후손들도 이순신 장군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밭 한 가운데 햇곡식과 햇과일로 제단을 만들어 해마다 ‘근검제’를 지냈다고 해요. 운봉의 근검제는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던 일제가 이를 금지하기까지 300년이나 이어졌다고 합니다.

 


#북한 개성공단 조성에 투입된 덤프트럭과 포크레인 등 남한의 중장비들이 굉음을 울리고 있다. 공사장 뒤편으로 멀리 송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를 처음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의 존재를 잘 몰랐다. 아무런 설레임도 없었다. TV를 통해 수없이 그의 모습을 확인했으므로 그가 새로운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던 탓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북한이란 '그'를 만나러 떠나는 날, 나의 감정은 솔직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새벽 잠을 설치며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번거러움만 컸을 뿐이었다. 사실,전날 밤 늦도록 먹은 술독이 그 때까지 오장육부를 쥐어짜고 있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12월 7일 아침 나는 그렇게 고려의 도읍지, 개성으로 향했다. 우리은행의 개성공단지점 개점식 참석을 위해 동료 기자, 은행 임직원,기업가 등 150여명과 함께 버스를 타고 북으로 떠났다. 남쪽 CIQ(경의선도로 출입시설)를 통과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쪽 CIQ에 이르자 깡마른 북한 병사가 버스에 올랐다. 그는 버스 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더니 승객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OOO선생, OOO선생..."


곧이어 우리 일행을 실은 4대의 버스는 일제히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개성의 남단에 자리한 공단까지는 불과 5km 남짓한 거리였다. 조촐한 은행개점식을 마친 일행은 점심식사 장소인 자남산 여관으로 향했다. 남쪽의 호텔 격인 자남산 여관은 개성시내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개성 시가지의 생생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소달구지를 끌고가는 아저씨, 우물가에서 물동이를 짊어지고 가는 아이,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 간혹 땔깜을 이고가는 아주머니도 눈의 띄었다. 한결같이 60,70년대 남녘의 시골에서 봄직한 그런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 핏기 없는 거무스름한 얼굴에 아무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바깥을 향해 손을 흔들자 몇몇 주민들은 답례로 손을 흔들기도 했다.

하얀색의 아파트 건물과 빌딩들이 길 옆으로 도열해 있었으나 하나같이 낡고 초라한 몰골이었다. 상가나 간판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것이라곤 '리발관' '물고기(생선가게 인듯)'  그런 부류가 대부분이었다.  길거리에서 상가 간판보다 더 많은 것이 바로 선전문구가 적힌 간판이었다.

'미제를 타도하자'

'위대한 김일성 동지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위대한 장군님만 계시면 우리는 이긴다'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님 만세'


놀라운 일은 개성 시가지에서 차량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두 세시간 동안 본 것이라곤 길옆에 세워진 낡은 미니버스 한대가 고작이었다. 그 버스에는 승객도, 운전사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시내 도로엔 횡단보도나 차선이 없었다. 평양~개성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역시 통행하는 차량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영화촬영 세트장 같아요. 사람들이 길을 왔다갔다 하고 있지만 그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어요. 그저 감독이 저리로 가라고 하니까 목적없이 걸어다니는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것 같지 않아요?"

우리 일행중 한 사람은 개성의 첫 소감을 이렇게 그렸다. 저녁 해가 서산으로 뉘엇뉘엇 넘어갈 무렵, 나는 '그'를 남겨두고 남녘으로 향하는 버스에 다시 몸을 실었다. 전력과 땔감이 부족해 불빛과 방안의 온기마저 식어버린 북녘이 저만치 멀어져갔다. 7시간 동안의 짧은 체류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남쪽 CIQ를 거쳐 버스가 속도를 내자 파주와 일산시가지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동공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이윽고 버스가 서울시내로 들어서자 퇴근길 길바닥에 꽉 들어찬 차들이 마치 나를 반기는 듯했다. 사람의 체취와도 같은 정겨움이 몸에 전해졌다. 일행과 헤어져 집으로 향하는 전철에서는 문화적 이질감에서 오는 혼돈과 서글픔이 가슴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노랑머리에 리시버로 음악을 듣는 20대 청년, 핸드폰으로 연신 재잘되는 아가씨들. 윤기있는 얼굴에 하나같이 밝은 표정이었다. 불과 한 두시간전에 봤던  그들과는 전혀 다른 별천지에 온 것 같았다.

  마치 금새 꿈을 꾸고난 것처럼...

 구나 돈을 갖고 싶어하는 요즘과는 달리 돈을 싫어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조선 중엽에는 돈을 만들어도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대요. 나라에서 만든 동전을 돈으로 여기지 않았던 까닭에서죠.

 조정에서 참다못해 암행어사와 같은 관리를 지방에 내려보냈어요.  효종 5년(1654년), 상평청(물가조절을 맡은 기관)은 ‘행전별장’이란 관리를 파견했어요. 그의 임무는 백성들에게 돈의 사용을 장려하는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무조건 엽전 반 냥(5전)을 갖고 다니게 한 뒤 이를 어기면 법에 따라 엄히 처벌했어요. 행전별장은 백성들을 불러 모아놓고 그 중에 엽전을 차지 않은 사람을 찾아내 채찍으로 마구 때렸어요. 그래서 돈 없고 힘 없는 백성들은 멀리서 별장이 나타나기만 하면 36계 줄행랑을 쳤답니다. 
 
 조선 초기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은 우리나라 최초의 종이돈인 ‘저화’를 만들었습니다. 왕은 자기가 만든 저화를 널리 보급하려 애썼어요. 그래서 관리들이 저화 대신에 다른 것으로 대금을 지불하면 관직을 삭탈하고, 백성들에겐 재산을 몰수했답니다.  그 당시 옷감 재료인 ‘포’가 화폐 대신에 많이 사용되었어요.  포를 화폐로 쓰다 들킨 백성은 서울 종로의 길거리에 사흘간 서서 행인들의 조롱을 받아야 했어요. 또 곤장 백대를 맞고 벌금으로 저화 30장까지 내야 했어요. 나라에서 돈의 유통을 위해 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동원한 셈이지요.

 그런데도 백성들은 여전히 저화를 싫어했답니다.  돈보다 쌀이나 포로 값을 치르려고 했어요. 저화가 돈으로서 일정한 값어치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신뢰를 얻지 못한 돈은 백성들에게 한낱 쇳덩이나 종이 조각에 불과했던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