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북한포로 육군중위 '52년만의 귀환' - 세계일보 블로그

 

[단독]북한포로 육군중위 '52년만의 귀환'

 

장선생씨 선양영사관서 조국행 대기중

지난6월 탈북…조창호씨 이래 장교론 최고위

"죽어도 고향에서…" 두번이나 사선넘었다

 ◇지난달 16일 장선생 중위가 탈북 후 숨어지내고 있던 중국 옌지시내의 한 아파트에서 취재팀을 만나 탈북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옌지=특별기획취재팀
6·25전쟁 중 중공군에 붙잡혀 북한에 억류됐던 육군 중위 출신 국군포로가 52년 만에 탈북에 성공했다.

10일 국방부 등에 따르면 육군 중위 장선생(張善生·78·본적 충북 충주시 용탄리·군번 123990)씨가 지난 6월14일 탈북,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시의 한 아파트에 은신하다 중국 선양(瀋陽) 한국영사관의 안전가옥으로 옮겨져 한국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장교 출신 국군포로가 탈북에 성공하기는 1994년 조창호 소위 이래 11년 만이다. 조씨 이래 50명의 포로가 귀환했으며, 조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병 출신으로 중위는 귀환 국군포로 중 가장 높은 계급이다. 장씨는 그간 탈북을 도운 브로커들이 수고비 명목 등으로 ‘몸값’ 수천만원을 요구하는 바람에 은신처에 20여일간 억류돼 있다가 최근 한 인권단체가 몸값을 제공, 가까스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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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는 2003년에도 중국 허룽(和龍)으로 탈출했으나 몸값을 마련치 못해 한국 입국에 실패했다. 장씨가 이번 달 한국에 입국하면 휴전 후 탈북, 귀환한 국군포로는 모두 51명으로 는다.

이에 앞서 취재팀은 장씨가 탈북한 지 이틀 뒤인 6월16일 중국 옌지에서 현지 브로커를 통해 장씨를 만나 탈북사실을 확인했지만, 장씨의 신변안전을 고려해 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장씨는 취재팀에 전쟁 당시 부상을 입은 오른쪽 다리의 상흔을 보여주며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장씨는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몹시 허약했고, 다리 부상 악화로 거동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또 오랜 탄광생활에 따른 후유증으로 청력을 상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장씨는 확인 결과 1927년 8월7일 생으로 서울 덕수공립상업학교 재학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광주포병학교 간부후보생으로 입교한 뒤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휴전 직전인 1953년 7월 강원도 김화지구 전투에 관측장교로 참가했다가 부하들과 함께 중공군에게 포로가 됐다. 장씨는 포로가 된 뒤 함북 은덕군 은덕읍 아오지탄광 등에서 30년 동안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장씨의 남측 가족들은 휴전을 사흘 앞둔 1953년 7월24일쯤 장씨의 실종 사실을 통보받았으며, 이후 장씨는 전사자로 처리돼 현재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장씨는 5남매 중 장남으로 현재 서울에 선광(71·강동구성내2동)씨 등 남동생 2명과 미국에 여동생 2명이 살아 있다. 북한에도 부인과 사이에 7남매를 두고 있다. 형의 탈북 소식을 들은 선광씨는 “명절 때마다 형님 밥을 따로 떠 놓고 살아 돌아오기만 학수고대했는데 형님이 탈북에 성공했다니 꿈만 같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특별기획취재팀

specials@segye.com

 
포로에서 북한 탈출까지
 ◇탄광에서 동료들과 북한에 억류됐던 장선생(윗줄 맨 왼쪽)중위가 지난해 3월 본인의 생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서울의 가족에게 보낸 사진. 사진 뒷면에 ‘아탄에서 1956. 7.1’이라고 적혀 있어 당시 북한 아오지 탄광 동료들과 찍은 기념사진으로 추정된다. &장선생씨 가족 제공
‘중위 장선생’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위패봉안관 검은색 대리석 현판에 또렷이 새겨져 있는 6·25전쟁 전사자의 이름이다.

‘육군 11야포단 72대대 소속 군번 123990’

죽었던 그가 살아서 돌아왔다.

1953년 7월 강원도 김화지구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후 아오지탄광등을 전전하며 평생을 보낸 20대의 젊은 육군중위가 부상과 강제노동으로 만신창이가 된 노구를 이끌고 사선을 넘어 52년 만에 조국의 품에 안긴 것이다.

◆첫번째 탈북은 실패=장씨가 죽어도 고향에서 눈을 감겠다는 일념으로 첫 번째 탈북을 시도한 것은 2년 전인 2003년 5월. 6·25전쟁 중 입은 오른쪽 정강이 부상이 악화돼 제대로 걸음도 떼지 못하는 그였지만 “남한에 사는 가족을 찾아주겠다”는 브로커의 말만 믿고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허룽에 도착한 장씨는 서울에 살고 있는 동생 선광씨와 ‘전화 상봉’에 성공했다. 그러나 장씨가 귀가 어두워 동생과 제대로 통화할 수 없었다. 게다가 브로커가 수천만원의 탈북비용을 요구하자 선광씨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1차 탈북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북한으로 돌아온 장씨는 그러나 귀향의 꿈을 버지리 못했다. 장씨는 지난해 3월 인편을 통해 다시 아오지탄광에서 찍은 빛바랜 흑백 사진과 부모 형제 이름이 깨알같이 적힌 편지를 동생에게 보냈다.

형님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한 선광씨는 곧바로 국방부 등에 “(형님이) 조국과 가족의 품에 돌아올 수 있도록 사전 만반의 조치를 강구해 달라”고 진정서를 내는 등 형의 귀환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생활이 궁핍한 그로서는 믿을 곳은 정부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국군포로 탈북 경비를 지원할 근거가 없으니 가족이 알아서 하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정부 무관심으로 한때 북송 위기=실의에 잠겨 있던 장중위에게 브로커가 다시 찾아온 것은 지난 6월 초. “중국 옌지까지만 오면 뒤를 봐줄 테니 국경을 넘으라”는 브로커의 말에 지난 6월 14일 새벽 아들 등에 업혀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북한 탈출에 성공한 장씨는 브로커들이 마련한 옌지 시내의 한 아파트에 숨어 있었다.그러나 남쪽 가족들이 브로커가 요구하는 수천만원에 이르는 수고비 명목의 ‘몸값’을 마련치 못하는 바람에 이곳에서 20여일간 불안한 인질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정부는 탈북 직후 이 사실을 알았으나 장씨의 신변 안전 확보와 송환을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장씨는 한때 중국 공안당국에 발각될 것을 우려한 브로커들에 의해 강제 북송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장씨 귀환을 추진했던 민간단체 관계자는 “장씨가 탈북한 지난 6월14일부터 국방부를 여러 차례 찾아가 가족들이 형편상 몸값 마련이 어려우니 이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며 “하지만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북한 브로커들이 몸값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장씨를 다시 북으로 데려가겠다고 협박했다”며 “안면이 있는 조선족 브로커에 사정사정해서 북한 브로커에게 몸값 일부를 대신 주도록 해 가까스로 강제 북송을 막았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보름 넘게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본지의 탐사기획 ‘잊혀진 국군포로’ 시리즈가 보도(6월 21∼27일)된 뒤인 6월 말쯤 장씨 동생 집을 방문, “몸값을 해결하라”고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선광씨는 “6월 말쯤 국방부 관계자가 집으로 찾아와 몸값을 마련하라고 요청했다”며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정부가 나서 달라고 요청했지만 규정상 어렵다는 대답만 들었다”고 밝혔다.

북송 위기에 처했던 장씨는 이번달 초 국내 한 인권단체가 2000만원의 몸값을 마련, 지불한 다음에야 천신만고 끝에 중국 내 한국영사관 측에 인계될 수 있었다.

◆포로에서 탈북까지 52년=장씨는 휴전을 앞둔 1953년 7월 강원 김화지구전투에 관측장교로 참전했다가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장씨는 당시 오른쪽 정강이에 포탄 파편이 박히는 큰 부상을 당해 평생을 절룩거리며 살고 있다.

포로로 잡힌 장씨가 끌려간 곳은 악명 높은 함북 아오지탄광. 장씨는 아오지탄광에서도 가장 힘든 굴진·채탄 작업을 하며 30도가 넘는 갱도에서 30여년간 중노동에 시달렸다. 열악한 작업환경과 혹독한 노역으로 장씨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고, 청력도 거의 상실했다.

장씨는 61세에 ‘연로보장’을 받고 서야 악몽 같은 탄광 노동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씨는 이후 함북 청진으로 옮겨졌고, 국경지역을 넘나드는 보따리상 등을 통해 남한 소식을 들으며 귀환의 꿈을 키워왔다.

특별기획취재팀 홍성일·최현태·김형구·김종수·엄형준 기자

specials@segye.com

 
 
취재하기까지
억류브로커에 수고비 건넨뒤 장중위 만나
취재팀 중국공안 오인 한동안 말문 안열어
지난 6월16일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지린성 옌지시의 한 허름한 아파트. 취재팀이 방으로 들어서자 TV를 통해 남한 방송을 지켜보던 국군포로 장선생(78) 중위는 깜짝 놀라듯 움찔 뒤로 물러섰다. 취재팀을 중국 공안당국이나 북한 보위부 관계자로 안듯 했다. 장씨는 한동안 말문을 열지 않다가 브로커가 “남측 가족들이 보낸 사람”이라고 설명하자 그제서야 입을 뗐다.

취재팀이 이에 앞서 한 관계자에게서 “국군포로 장교 1명이 오늘 새벽 두만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이틀 전인 6월 14일. 취재팀은 부랴부랴 중국으로 출국했다. 중국 옌지에서 수소문 끝에 장씨를 억류하던 조선족 브로커를 어렵게 찾아냈다. 취재팀을 장씨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러 온 남측 가족 대리인으로 소개하고 수고비까지 건넨 후에야 장씨를 만날 수 있었다.

장씨는 취재팀에게 국군포로임을 확인시키려는 듯 오른쪽 정강이의 10cm가량의 흉터를 가리키며 “포로로 잡힐 때 포탄 파편이 박힌 상처인데 요즘 계속 붓고 있어 걷기조차 어렵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영양 섭취를 못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장씨는 노령으로 귀가 좋지 않고 발음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장씨는 “하루빨리 꿈 속에서도 그리던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취재팀이 장씨에게 북한에서의 생활을 더 물었으나, 브로커가 더 이상 대화를 못하게 끼여드는 바람에 취재팀은 아쉬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장중위 입국하면
일계급특진 대위 전역… 51번째 귀환포로
장선생 중위는 한국에 입국하면 국정원의 조사 과정을 거쳐 소속 사단에서 전역식을 갖고 예편하게 된다. 장씨는 다른 귀환포로들의 전례에 따른다면 일계급 특진돼 대위로 전역할 가능성이 높다.

1994년 첫 귀환한 조창호(75)씨는 당시 육군소위였지만 탈북 등의 공로가 감안돼 중위로 전역했다.

장씨가 입국, 전역하면 ‘국군포로 대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봉급 ▲연금 ▲주거지원비 ▲특별지원비 등 보상금이 지급된다. 보상금은 계급과 근속연수 등에 따라 다르지만 본지가 국내에 정착한 귀환포로 32명을 조사한 결과 1인당 평균 3억50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봉급은 포로가 된 시점부터 전역하는 시점까지 월급을 합산하고 수당을 더해 지급한다. 월급, 연금과 별도로 20평 이상 규모의 아파트나 이에 준하는 주거지원비(통상 1억2000만원)가 지급된다. 이를 모두 합할 경우 귀환포로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인 장씨는 최소한 5억원 이상의 보상금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귀환포로는 그간 모두 51명으로 장씨와 조씨 2명을 제외한 49명은 사병 출신이다.

본지가 귀환 포로 32명을 계급별로 조사한 결과 이등중사(현재 병장)가 20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일등병 6명, 이등병 4명, 하사(현재 상병) 1명, 소위 1명 순이었다. 귀환 포로 중 장교 출신이 드문 것은 병사들보다 숫자가 적기도 하지만 더 심한 감시와 차별을 당한 탓이다.

 

 

서울사는 동생 선광씨

"돌아가신 아버지 그대로…정말 우리형님이 맞네”
“형님 얼굴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쏙 빼 닮았네. 그리고 말하는 모습을 보니까 정말 우리 형님이 맞네….”

국군포로 장선생씨의 동생 선광(71·사진)씨는 10일 서울 강동구 성내2동 집에서 취재팀이 지난달 중국 현지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해온 형님의 인터뷰 동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장씨는 “50년도 더 됐지만 형과 동해안에 놀러가 조개를 따고 같이 놀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장씨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형의 얼굴이 비춰지는 노트북을 바라보다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선광씨는 “한국전쟁 휴전을 불과 사흘 앞두고 군의 통지를 받았는데 형이 전투 중에 실종됐다는 내용이었다”며 “전사가 아니라 실종이어서 반드시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는 장남이 살아 돌아올 것으로 믿고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고 수년 동안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도 하셨다”며 “명절 때는 형님 밥상을 따로 차리고 차례를 지냈고, 매년 현충일에는 가족들이 위패가 모셔진 국립현충원을 찾기도 했다”고 말했다.

선광씨는 “중풍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25년 전에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형을 찾으셨다”며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한 형님만 곁에 계셨어도 우리 가족이 전쟁 직후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덜했을지 모른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선광씨는 “형님이 귀국하시면 곁에서 모시겠다”며 “북에서 너무 고생하고 못 드셔서 빼빼 마른 것 같은데 끼니를 제대로 챙겨드리고 한국 생활 적응도 적극 돕겠다”고 말했다.

특별기획취재팀



"죽고나면 무슨소용… 국군포로 대책 세워달라”

 

[탐사기획 잊혀진국군포로]6회 그들이 사라지기 전에

(6-1)귀환포로들 조속해결 촉구


5~6년 지나면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져


6·15 공동성명땐 한마디 언급안해 분통

 ◇6·25 당시 중국군들이 사로잡은 국군포로들을 어디론가 이송하고 있다. 이 포로들 중 상당수는 다시 한국땅을 밟지 못하고 숨지거나, 북한에 아직도 억류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진은 59년 중국당국이 펴낸 ‘영광스러운 중국인민지원군’ 제하의 책자에 실린 것이다. 눈빛출판사 제공
한국에 정착한 귀환국군포로들은 북한에 억류 중인 생존 포로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무관심과 무책에 분통을 터뜨렸다. 6·25 당시 20대 젊은이였던 포로들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부분 포로수용소와 광산의 고된 노역으로 숨졌고, 살아남은 이들은 거동조차 불편한 70대 후반의 노인들이 돼버렸다. 그러나 이들조차 5∼6년만 지나면 사실상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 국군포로 문제는 영원히 과거사로 묻히고 말것이라는 것이 귀환포로들의 주장이다.

[관련기사]귀환포로가 본지에 보내온 호소문

[관련기사]전문가 좌담

◆국군포로 얼마나 있나=취재팀이 지난 14일 국방부로부터 정보공개청구 결과를 통보받은 내용에 따르면 정부는 542명의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는 귀환포로와 탈북자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실제 북한에 남아있는 포로생존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본사 취재팀이 32명의 귀환포로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만 해도 최근까지 북한 16개 광산지대에 600여명의 포로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또 통일부의 지난 7일 정보공개자료에 따르면 6·25 당시 실종된 국군은 4만1971명. 정부는 이 가운데 포로교환 시 귀환자 8726명과 유가족 신고 및 관련자료에 의해 전사처리한 1만3836명을 제외한 1만9409명을 실종자로 추정하고 있다.

유엔군사령부는 1953년 8월 유엔에 제출한 ‘휴전에 관한 특별 보고서’를 통해 6·25로 인한 국군 포로 및 실종자수를 8만2318명으로 집계했다. 그러나 6·25 전체를 통해 북한 측이 송환한 한국군포로는 모두 8726명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많게는 7만∼8만여명의 포로가 송환되지 못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정부, 해결 의지가 없다=귀환포로들은 대부분 정부가 국군포로 송환문제 해결에 의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귀환포로 32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87.6%(28명)가 ‘정부가 이 문제 해결에 의지가 없다’고 답했다. 단지 응답자의 6.2%(2명)만이 ‘한국정부가 실상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적극적인 해결의지가 있다’고 긍정적인 답변을 했을 뿐이다.

귀환포로 고을원(74)씨는 “정부가 생존 국군포로가 많다는 것을 잘 아는 것 같은데 관심이 없다”며 “6·15 남북공동성명 때도 포로 얘기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구걸해서 먹고 사는 나라인데도 이인모씨가 북송됐을 때 환영사업이 북한 땅을 다 흔들 정도였다”며 “한국정부는 나라를 위해 목숨걸고 싸웠던 포로들에 대해 그저 전역식이나 해주고, 퇴직금이나 주고 나면 모든 것을 다했다는 식”이라고 말했다. 함북 회령시 학포탄광에서 일하다 지난해 6월 탈북한 오진상(80)씨는 “내가 일하던 탄광에 500명 가까운 포로가 있었는데, 대부분 죽고 다른 곳으로 끌려가 23명밖에 남지 않았었다”며 “이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기 전에 포로송환 문제가 해결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귀환포로 이순옥(77)씨는 “북한에 있을 당시 한국정부가 구출해주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며 “한국정부가 북한에 끌려다니는 것을 알고 있어 너무 원망스러웠다”고 말했다.

◆북한에 정식으로 문제제기해야=이들은 ‘국군포로 송환문제 해결과 관련, 가장 바람직한 해결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응답자의 50%(16명)가 ‘남북대화 시 국군포로 송환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해 해결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다음으로는 40.7%(13명)가 ‘국군포로의 3국을 통한 탈북 지원’이라는 현실적인 방안을 꼽았다. 국제기구를 통한 포로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단지 3.1%(1명)만이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2000년 8월 탈북한 유모(76)씨는 “현정부가 과거사 규명한다고 하는데 과거사 규명도 중요하지만 현재사 처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국군포로들이 살아 있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과거사가 돼 버린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서병렬(74)씨는 “자기 나라 사람에 대한 문제인데 한국은 그런 건 영 못하는 것 같다”며 “북한에 식량도 주고 비료도 주는데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듣는 사람도 좋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2년 한국에 입국한 최기호(77)씨는 “북한은 국군포로의 탈북이 심해지면 이들의 거주지를 바꿔버려 찾기가 어려워진다”며 “남북한 접촉을 통해 국군포로와 그 가족의 문제를 협상의 주요 의제로 다루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2년 2월 귀환한 이삼출(76)씨는 “국군포로가 중국으로 탈북했다가 한국정부가 도와주지 않아 다시 북한으로 압송된 경우도 있다”며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게 고생했는데···, 정부가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기획취재팀=홍성일·최현태·김형구·김종수·엄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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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귀환포로가 본지에 보내온 호소문
조국위해 나섰다 북한서 평생 고통 정부서 책임져야
북한에 있을 때인 1993년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이 한국의 인도주의적 시책으로 판문점을 통해 북송되는 장면을 TV로 지켜봤습니다. 북한은 당시 이씨가 정치적 지조를 굽히지 않고 여러 해 동안 힘든 생활을 이겨냈다고 선전했습니다. 그에게는 ‘혁명의 불사조’라는 수식어가 붙었으며, 북한 주민 최대 영예인 공화국 영웅 칭호가 수여됐습니다. 대동강변의 별장도 제공됐습니다.얼마 후 이씨는 영웅칭호를 또 받아, 2중 영웅이 되었습니다.

2000년 10월에는 64명의 장기수가 북송됐습니다. 그때도 엄청난 환영행사가 열렸고 화려한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만약 장기수들이 국군포로들과 같이 지옥 같은 탄광에서 50년의 세월을 중노동으로 보냈다면 어땠을까요? 그들이 그렇게 성한 몸으로 살아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수많은 국군포로들은 참으로 억울하게도 오랜 세월 사람대우조차 제대로 못 받으면서 고역을 치렀습니다.

늙고 병든 몸이 다 된 오늘까지도 그들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입니다. 정부는 누구 한 사람 이들의 송환 문제에 책임지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북한의 ‘국군포로는 한 명도 없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난 오늘에도 정부는 생존 국군포로의 숫자나 세고 앉아 있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입니다.

이 일은 시급히 풀어야 할 중차대한 역사적 문제입니다.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무슨 명분으로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보낼 것입니까? 1994년 조창호 소위가 처음 귀환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그간 1년에 5명꼴로 50명의 포로들이 돌아왔습니다. 생존 국군포로 500여명이 자력으로 한국으로 탈출한다면 100년이 걸린다는 계산입니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나라가 나서서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6-3)전문가 좌담
"남북대화때 송환문제 핵심의제 다뤄야”
 ◇조창호 <탈북 국군포로 1호·예비역 중위>, 심구섭 <남북이산가족협의회 대표>, 조성훈 <국방부 군사편찬硏 선임연구원>(사진왼쪽부터)
지난 21일부터 탐사기획 ‘잊혀진 국군포로’ 시리즈를 집중보도한 세계일보는 국군포로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초청, 좌담회를 가졌다. 참석자들은 “북한은 ‘억류 국군포로가 한 명도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하지 말고, 먼저 국군포로 생사확인에 나서 현황을 공개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도 국군포로들이 사라지기 전에 이들을 송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 24일 본사 편집국 회의실에서 열린 좌담회에는 ‘탈북 국군포로 1호’ 조창호(예비역 중위)씨와 남북이산가족협의회 심구섭 대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조성훈 선임연구원 등 3명이 참석했다.

―6·25전쟁이 끝난 지 52년이 넘도록 정부가 북한 억류 국군포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심구섭=그동안 정책 당국자의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자력으로 데려온 국군포로는 이제까지 단 한 사람도 없다. 브로커를 통해서라도 북한을 탈출했으면, 한국에 데려오는 건 정부 몫 아닌가. 국군포로는 정식으로 전역 신고를 하기 전까지는 일종의 ‘현역 군인’이다. 대한민국의 군인이란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이자 군인이 조국에 들어오려 한다면 우리 정부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데려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조성훈=6·25는 이념전쟁의 성격이 강한 특이한 전쟁이었다. 북한은 국군포로가 본인의 의사에 따라 북쪽에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민군이나 북한주민으로 편입시킨 뒤 지금까지 북에는 국군포로가 더 이상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조창호=이 문제는 희망이 안 보인다. 우리 정부는 국군포로 송환문제에 관심도 없고, 데려올 의지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재향군인회 서부지회장인 정용봉 박사는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국군포로 탈북에 열정을 쏟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이 문제는 여야를 가릴 것도 없다. 우리정부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북한에 식량·비료를 보낸다면, 왜 북한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포로를 보내지 않는가.

▲조성훈=한국전쟁 당시 정전협상 때도 포로 교환 문제가 해결 안 돼 1년 이상 걸렸다. 그만큼 복잡미묘한 문제다. 미귀환 국군포로가 발생한 책임은 일단 북한에 있다고 본다. 북한이 국군포로를 임의적으로 인민군, 주민으로 편입시켜버렸다. 한국정부가 6·25 당시 유엔군 측이 생포한 포로 가운데 북송을 거부하던 포로들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명분으로 풀어줬는데, 북한이 이를 문제 삼아 포로송환을 반대했던 것이다. 미귀환 포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상호주의와 인도주의적 방식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포로의 생사와 주소 등을 확인한 후 이산가족 교류방식으로 풀어가도 좋을 것이다. 한국전 당시 중국군에 포로가 됐으나 송환을 거부했던 미군포로 21명이 중국에 살다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돌아가거나 미국 가족을 방문했던 사례는 좋은 본보기로 삼을 수 있다.

―국군포로 귀환 문제를 남북 회담이나 국제 기구를 통해 이슈화한다면 해결 가능성을 높일 수 있지 않나.

▲심구섭=지난해 서울대생을 대상으로 한 특별강연에 나가 “차차기 대통령 때는 이산가족 문제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팔순에 가까운 국군포들은 앞으로 10년 뒤면 대부분 돌아가실 것이다. 10년 후면 국군포로 문제가 과거사가 된다는 얘기다. 그만큼 시급한 문제다. 미군은 수십년 동안 북한에서 단 한구의 미군유해라도 발굴하기 위해 애를 쓰는데, 우리 정부는 뭘 하는가. 남북 회담이나 국제기구에 이 문제를 적극 제기하는 성의가 아쉽다.

▲조창호=국군포로 문제를 낳은 책임이 대한민국에 있는지, 아니면 북한이나 유엔에 있는지 등 책임 소재를 더 이상 가릴 필요는 없다. 정말 순수하게 인도적 차원에서 국군포로 문제에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 지난 4월 정용봉 미국 재향군인회 서부지회장의 초청으로 미국하원의 국군포로 문제 포럼에 참석해 이렇게 얘길 했더니, 미국 사람들도 모두 공감하더라.

▲조성훈=국제기구를 통한 공론화도 좋지만, 일단은 전쟁 당사자의 한 축이었던 중국 측에 해결을 촉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전쟁포로 관리처를 공동 운영했기 때문에 국군포로에 관한 정보를 상당부분 북한 당국과 공유했을 것으로 본다. 아울러 북한에 있는 포로에 대한 정보는 북한 당국이 가장 잘 알고, 거꾸로 한국 내 공산포로에 대한 정보는 우리 정부가 가장 잘 안다. 북한이 국군포로의 규모 및 생사 확인 등에 적극 나서고, 한국 정부도 북한이 궁금해하는 공산포로 관련 사항을 충분히 협조해준다면 서로에게 득이 될 것이다.

―귀환 포로의 대우와 관련해서도 상당한 불만이 나왔다. 한국생활 적응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부족하고, 사기도 많이 당한다는 것이다. 귀환포로의 한국생활 적응을 위한 현실적 지원책은.

▲조창호=나는 여러 포로들한테서 보상금 액수에 대한 불만을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정부 보상금 3억∼4억원이 적은 돈이 아니니 잘 간수해 쓰라고 한다. 물론 북한에 남은 가족을 탈북시키기 위해 대부분 쓰긴 하지만, 브로커에게 턱없이 많은 거액의 수고비를 줄 필요는 없다. 남한 물정을 잘 모르는 국군포로가 브로커 등에게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부도 이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보상금 지급 방식을 좀더 고민해야 한다.

▲조성훈=사견임을 전제로 얘기하자면, 일반 6·25 참전자들이 월 6만원의 보상금을 받는 데 비하면 국군포로의 보상금이 사실 적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귀환 포로들도 보상금 액수 자체가 적지 않다는 데 대해선 이해해야 한다. 다만 귀환 포로들이 한국 사회에 빨리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심구섭=나도 고등학교 2학년 때 6·25에 참전했지만, 내가 받는 참전유공자 연금은 월 6만원에 불과하다. 사실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걸 실감한다. 이를 보면 귀환포로가 받는 보상금이 적은 액수는 아니다. 하지만 의료지원 혜택이 부족하다는 점은 큰 문제다. 아파도 병원비가 부족해 끙끙 앓는 귀환포로가 많다.

―정부가 국군포로 탈북 및 한국 귀환에 관여하는 단체에 경비를 지원하는 내용의 국군포로 대우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최근 김문수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발의했다. 쉽게 말하면 국군포로 탈북에 개입하는 브로커에게 활동비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인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심구섭=나는 국군포로 가족들에게 늘 말하기를 “조선족 현지 브로커에게 절대 1만달러(1000만원 상당) 이상 주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탈북 및 송환 작업의 위험성을 생각하면 사실 1만달러, 2만달러도 아깝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만한 돈이 없어 포로 귀환에 동의하지 않는 가족들이 많은데, 정부가 이런 탈북 경비를 지원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조창호=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브로커들도 ‘몸값’ 욕심에 포로 탈북작업에 나서고 있지만, 어찌 보면 굉장한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것이다. 탈북 경비가 적지 않게 드는 것도 사실이다. 국군포로의 남한측 가족이 그런 경비를 마련하기 어려워 못 데려온다면, 정부라도 나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성훈=국방부 공식 입장이 아니고, 순전히 사견을 전제로 얘기하면, 남북 정부 간의 포로 생사확인이 먼저 해결될 때 브로커 경비지원도 자연히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국군포로 탈북 관여 단체에 대해서는 음성적 경비 보조가 아니라 정상적 지원이 돼야 한다.

사회 최현태 특별기획취재팀 차장,

정리 김형구 기자, 사진 김창규 기자

specials@segye.com

 

 

북선 차별받고 남선 밑바닥 삶

 

[탐사기획-잊혀진 국군포로]5회 가족의 비애

(5-1)탈북후 영사관 '문전박대'..입국해도 막노동판 전

 ◇6·25 참전 국군포로 가족모임과 납북자가족협의회 소속 회원들이 23일 남북 장성급 회담이 열린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 명월관 앞에서 국군포로의 즉각 송환과 유가족 보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종덕 기자
북한에 억류됐던 국군포로 아버지가 숨진 뒤 ‘아버지의 나라’를 찾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일반 탈북자로 간주될 뿐 다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국군포로 가족들은 아버지가 이미 사망했을 경우 보상금 등 아무 혜택이 없다. 북한에서 ‘남조선 괴뢰군 포로의 자식’으로 낙인찍혀 차별대우와 함께 온갖 인권침해를 당했지만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이다. 또 국군포로 아버지와 함께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자녀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북에서 차별대우로 제대로 교육받은 것이 없다보니 한국 사회에서도 막노동판을 전전하기 일쑤다.

◆국군포로 유가족 2, 3세들 100여명=현재까지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온 국군포로 유가족들은 1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 2월 발족한 ‘6·25참전 국군포로 가족모임’ 관계자는 “북에서 사망한 국군포로의 2세가 처음 귀환한 것은 98년쯤이었다”며 “우리 모임 회원 대부분은 30대 중·후반인데, 3∼4년 전에 북한에 경제난이 심각했을 때 탈북한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국군포로는 일흔이 넘는 고령이라 국경을 넘기 어렵지만, 2세들은 차별대우를 피해 중국으로 넘어왔다가 몽골, 베트남 등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해외 한국 공관부터 박대=국군포로의 아들 최성국(31·가명)씨는 99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 두 형제와 함께 북한을 탈출했다. 미리 연락한 삼촌들이 중국으로 건너와 주중 한국영사관에 함께 들어가 최씨가 국군포로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영사관 직원은 편의를 제공하기는커녕 “자꾸 시끄럽게 하면 중국 공안에 신고하겠다”고 윽박질렀다.

최씨 일행은 할 수 없이 위조여권을 만들어 아버지의 나라에 입국해야 했다.

현지 공관의 이 같은 무관심 때문에 아예 국군포로의 유족이라는 것을 숨기고 입국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6월 몽골을 거쳐 입국한 서모(31)씨는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이나 몽골의 한국영사관에서도 ‘국군포로의 딸’ 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다른 탈북자들에 섞여 임시 여행자증명서를 받아 입국했다.

입국 후 국정원 조사를 받으면서야 작고한 부친이 국군포로란 사실을 털어놨다. 서씨는 “국군포로 유가족이라고 밝히는 것이 북한이나 중국에서나 전혀 도움이 될 게 없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책 전무=귀환한 국군포로 유가족들은 탈북자 대우를 받을 뿐 다른 혜택이 없어 제대로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 등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 국방부는 지난해 10월 6·25전쟁 중 북한에서 귀환하지 못하고 있는 국군포로의 재북 자녀 실태 파악과 지원 대책 마련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국방부 측은 ‘국군포로 문제의 실상과 대책’이란 책자를 공개하고 이 같은 내용을 밝혔지만, 현재까지 세부 일정이나 구체적인 계획이 나온 것이 없다.

◆국군포로 유골 갖고 온 가족=최근 가족들이 북한에서 국군포로의 유골을 갖고 입국한 경우가 3차례나 된다. 2002년 4월 백영숙(49)씨가 국군포로 아버지의 유골을 갖고 중국으로 탈출해 국방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국방부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산 사람은 도와줄 수 있어도 죽은 사람은 모르겠다”였다. 백씨는 탈북사실이 발각돼 북송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년 만인 지난해 4월 유골을 모시고 입국했다.

지난해 10월 이연순(44)씨가 두 번째로 브로커를 통해 국군포로 아버지의 유골을 중국으로 갖고 왔다. 이씨는 중국에서 공안에 발각돼 숨겨놨던 유골을 빼앗기는 등의 진통 끝에 유골 일부만 갖고 한국에 입국했다. 올해 4월에는 이옥순(38)씨 자매 5명이 브로커를 통해 국군포로 아버지의 유골을 갖고 몰래 들어왔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국군포로 유해 처리와 관련한 법규조차 없다. 국군포로의 유해로 판명되면 관례에 따라 고향에서 노제를 지내고 영결식을 한 후 국립묘지에 묻힐 뿐이다.

지난해 귀환한 국군포로 김모(77)씨는 “국정원이 ‘앞으로 국군포로의 유해도 한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지만 말뿐이었다”고 말했다.

이연순씨는 “정부가 아버지 유골을 갖고 오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귀찮아했다”며 “국군포로의 유골을 가지고 입국한 이들은 살아 돌아온 국군포로에 준하는 보상을 하고 명예회복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상받은 국군포로 2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국군포로인 아버지와 함께 귀환한 자녀들도 한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마찬가지다. 제대로 교육받은 것이 없어 대부분 한국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1998년 국군포로 아버지와 함께 탈북한 김모(38)씨는 “탈북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며 “용역업체 전기실에서 월 87만원을 받으며 최하층으로 사느니 북에서 사는 것이 더 마음 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 세대는 판단력이 흐려서 탈북했을 것”이라며 “누나 두 명이 북에서 살고 있지만 여기 와서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탈북시킬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다”고 말했다.

2000년 귀환한 국군포로 박영기씨의 사위 임춘길(44)씨는 “아버지가 국군포로지만 북에서 돌아가셔서 장인가족과 함께 탈북했다”며 “포로 가족이라고 별도로 대우받는 것이 없어 공사판에서 일용직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기획취재팀=홍성일·최현태·김형구·김종수·엄형준 기자

specials@segye.com

 
](⑤-2)"포로귀환·유가족 처우 北측 눈치보지 말아야”
서영석 '국군포로 가족모임' 대표
“정부는 6·25 때 나라를 위해 싸우다 포로로 잡혀 귀환하지 못하고 북한에서 고된 삶을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한을 품고 한국으로 탈출한 유가족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합니다.”

‘6·25 참전 국군포로 가족모임’의 서영석(30·사진) 대표는 지난달 28일 “한국정부가 국군포로 귀환과 유가족들의 처우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눈치를 그만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2월 결성된 이 모임은 북한에 억류돼 있거나 사망한 국군포로 2, 3세 34명으로 구성됐다.

서씨는 “1953년 6월 김화지구 전투에서 포로가 된 아버지(서정헌)는 함북 무산광산 등에서 50년 동안 막노동을 하다 97년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는 자식들이 ‘남조선 괴뢰군 포로 자식’이라는 딱지가 붙어 차별을 겪을 때마다 죄스러워하셨다”며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 출신성분 때문에 희망했던 사범대학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부친이 작고한 후 북쪽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서씨는 98년 11월 어머니, 누나 2명과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다. 한국에 입국하기 위해 중국 선양주재 한국영사관에 들어가 직원들에게 “국군포로 가족”이라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반응은 냉랭했다. 서씨는 그제서야 국군포로 유가족도 일반 탈북자나 다름없이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했다. 그는 결국 다음해 위조여권을 사서 3개월 만에 입국할 수 있었다.

서씨는 “회원들은 부친의 명예 회복과 유해 귀환을 우선적으로 희망하고 있다”며 앞으로 사망한 국군포로 유가족들의 처우 개선과 북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생존 국군포로 500여명의 조속한 귀환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