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포로 247명 실명 첫 확인

 

[탐사기획-잊혀진 국군포로]

 

<2회 국군포로의 진실>

 

본지, 귀환 32명 증언 분석

생존 79·사망 43명…125명은 생사불명

한국전쟁 후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억류된 국군포로 247명의 실명이 확인됐다. 21일 본지 취재팀이 귀환한 국군포로 32명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북한 함경남·북도 등 광산 16곳에 억류된 국군포로 247명의 명단이 확인됐으며 이 가운데 79명은 최근까지 생존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43명은 이미 사망했고, 나머지 125명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보위부 등에 끌려가 생사가 확실치 않다.

북한에 억류된 포로 명단이 대규모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은 휴전 이후 지금까지 억류된 국군포로가 단 한명도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한국 정부는 일부 포로명단을 파악하고도 남북관계 및 신변안전 등을 이유로 명단을 공개한 적이 없다.

그러나 본보는 가족들이 전사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알고 있는 포로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도록 실명 공개를 결정했다.

귀환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6·25전쟁 중 붙잡혀 탄광 등 광산에서 50여년간 억류생활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이 억류된 것으로 파악된 광산은 강제노동으로 악명 높았던 함북 은덕군의 아오지탄광 등 16곳이다.

취재팀이 확보한 명단 분석 결과 아오지의 두 탄광(6·13, 오봉탄광)의 경우 23명의 생존 포로 이름이 확인됐다. 함북 새별군 하면탄광은 14명, 함북 회령군 학포탄광과 함북 온성군 상화탄광은 각각 10명의 생존 포로 실명이 파악됐다.

또 ▲함북 새별군 용북탄광 8명 ▲함북 무산군 무산광산 5명 ▲함북 새별군 고건원탄광 3명 ▲함북 온성군 주원탄광과 함남 단천군 검덕광산 각각 2명 ▲함북 온성군 온성탄광과 함남 단천군 용양광산 각각 1명의 생존자 포로 이름이 확인됐다.

생존·사망자 등을 포함해 가장 많은 포로의 실명이 확인된 곳은 고건원탄광으로 포로 이름 64명이 파악됐다. 이 가운데 3명은 생존해 있으며, 나머지 60명은 생사가 불투명하다. 1명은 사망했다.

아오지 6·13탄광은 44명의 수용포로 실명이 확인됐다. 이중 15명은 생존, 17명은 생사 불투명, 12명은 사망한 것으로 파악됐다.

함북 온성군 상화탄광은 17명의 실명이 확인됐고 이 가운데 10명은 생존, 7명은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귀환포로들이 생존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살아 있다고 증언한 인원까지 합하면 최근까지 북한 생존 억류포로는 600여명으로 추정된다. 귀환포로들은 고건원탄광에 가장 많은 350여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증언했다. 다음으로 아오지의 6·13탄광에 100여명, 검덕·용양광산에 각각 50여명, 학포·상화탄광에 각각 30명, 용북탄광에 20명이 살아있다고 밝혔다.

국군포로 홍모씨는 “고건원탄광에 영관·위관급 장교 포로 50여명 등 350여명의 포로가 있었다”며 “장교 출신들은 70,80년대에 대부분 보위부에 끌려가 처형되거나 교화소로 보내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국방부는 귀환포로와 탈북자들 증언을 통해 휴전 후 북한에 억류된 생존 국군포로 542명을 포함해 1369명(사망 636명, 행방불명 191명· 2004년 12월말 기준)의 포로명단을 확보, 대외비로 관리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기획관실 대북정책과 관계자는 “북한에 생존한 국군포로의 실명이 알려지면 신변이 위험할 수 있어 명단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별기획취재팀

specials@segye.com

 

(2-2)어디에 얼마나 있나

 

54년 아오지탄광에 500명 넘게 배치

탈북한 국군포로들의 증언으로 북한의 탄광·광산 지역 16곳에 최근까지 국군포로 79명이 생존했다는 사실이 처음 드러났다. 취재팀의 조사 결과 한국전쟁 당시 국군포로들은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수만명이 포로교환 시 남쪽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탄광·광산으로 끌려가 40∼50년간 중노동에 시달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61살이 돼서야 소위 ‘연로보장’을 받아 강제노동을 면했지만,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어 대부분 탄광·광산 지대를 떠나지 못하고 어려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국군포로 탄광·광산 지대 600여명 생존=취재팀이 만난 상당수 국군포로는 70살이 넘은 고령임에도 수십년 동안 같은 탄광이나 광산에 근무한 동료 포로들의 이름이나 고향을 줄줄이 외우고 있었다.

2000년 귀환한 엄모(77)씨는 취재진에게 자필로 정리한 A4용지 3장 분량의 포로명단을 제공했다. 이 자료에는 국군포로 59명의 이름과 나이, 출신지, 직업, 특이사항 등이 매우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국군포로들은 대부분 북한에서도 오지로 통하는 중·러 국경지대인 함북 최북단의 광산 일대에 집중 배치돼 생활하고 있었다. 포로들이 수용돼 있던 광산은 함북 10곳, 함남 3곳, 황북 2곳, 평남 1곳 등 모두 16곳이었다.

이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현재 생존 포로들이 가장 많은 곳은 함북 새별군 고건원탄광(350명)과 아오지탄광(100여명) 지역으로 파악됐다.

2000년 2월에 귀환한 장진환(79)씨는 “1972년 아오지에 갔을 때 6·13탄광과 오봉탄광 두 곳에 포로 500명이 있었다”며 “탈북 당시 100여명이 생존해 있었다”고 증언했다. 장씨는 “아오지탄광에는 6·25 포로수용소가 있었으며, 초기에 800여명이 수용됐었다”고 덧붙였다.

허재석(2000년 7월 탈북)씨도 “54년 4월 25일 평남 강동군 승호리수용소에서 부상이 회복된 포로들을 차에 싣고 평양역으로 이동하기에 당연히 포로교환이 되는 줄 알았다”며 “하지만 기차가 3일 만에 도착한 곳은 남한이 아니고 아오지탄광이었으며, 당시 포로는 500명이 넘었다”고 증언했다.

◆장교 포로는 별도 수용=함북 새별군 하면탄광과 고건원탄광에는 장교 출신 포로들이 대거 수용됐던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2001년 11월 귀환한 박모씨는 자신이 기억하는 85명(고건원탄광 62명, 하면탄광 23명)의 국군포로 명단을 자필로 적어 취재진에게 제공했다. 이 명단에는 고건원탄광의 이준 중령 등 14명, 하면탄광의 이종국 중위 등 3명의 명단이 포함돼 있다. 박씨는 하면탄광의 장교 3명 중 심형식 소령은 80년대 초 지병으로 사망하고 서채수 중위는 90년 초 처형됐으며, 탈출 당시 이종구 중위만 생존해 있었다고 증언했다.

박씨는 “하면탄광의 광부는 2000여명이었는데 이 중 30%가 국군포로였고, 이 탄광에 앞서 9년간 일한 고건원탄광에는 장교 출신 포로들이 많았다”며 “고건원탄광에서 함께 생활한 국군포로는 700명가량인데 이 가운에 절반이 숨졌다”고 증언했다. 지난해 5월 탈북한 이순옥(77)씨도 “고건원탄광에는 550명의 포로가 있었고, 이 중 장교가 50여명이었다”고 밝혀 박씨의 증언과 거의 일치했다.

◆강제노동 위해 포로 출신 부대 편성=국군포로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정전 직후 곳곳의 수용소에 흩어져 있던 국군포로는 평남 강동군의 수용소로 일제히 집결됐던 것으로 파악됐다.

북한은 당시 국군포로로 ‘내무성 건설대’를 구성해 1개 대대(약 500명)에서 많게는 2개 대대씩을 주요 탄광과 광산에 배치했다. 내무성건설대는 1701∼09, 9개 부대가 편성됐다. 1701부대가 아오지탄광에 배치된 것을 비롯해 1702부대는 학포탄광, 1704부대는 성천광산, 1706부대는 하면탄광, 1707∼1708부대는 검덕광산(나중에 일부는 용양광산으로 이동), 1709부대는 고건원탄광에 배치됐다. 북한은 이 밖에도 포로들로 210부대 등을 창설했다.

귀환포로 엄모씨는 “포로들은 주로 평남 강동군으로 집결됐는데, 200∼300명 모이면 인민군복을 입혀 함경도나 평안도의 광산·탄광 지대로 보내졌다”고 증언했다. 이순옥씨는 “53년 10월 초 평양 근처 강동포로수용소로 집결된 국군포로들은 아오지·고건원·하면·학포·유선·궁심 탄광 등에 약 500명씩 배치됐다”고 증언했다.

박모씨는 “정전 직후 포로는 평남 강동군의 포로수용소로 모두 집결했다”며 “여기서 포로수용소라는 명칭을 내무성 건설대로 바꾸고 1701∼1709부대로 9개 부대를 편성했다”고 증언했다.

◆탈북 성공 함북 학포탄광이 가장 많아=지난해 9월 귀환한 오진상(80)씨에 따르면 함북 회령시 학포탄광에는 포로 23∼30명 생존해 있다.

박동일씨는 “53년 7월 14일쯤 김화지구 전투에서 수도사단 500여명이 포로가 됐는데, 대부분이 학포탄광으로 끌려 갔다”며 “98년 탈북 당시 30명가량이 생존해 있었다”고 밝혀 오씨의 증언과 일치했다.

학포탄광에서 23년을 생활한 서병렬씨(2000년 2월 탈북)는 “학포탄광에는 국군포로가 약 625명이 있었는데 절반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안다”며 “탈출당시 3명의 생존을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이 탄광 출신 포로는 6명이 귀환에 성공했다. 아오지탄광 출신 5명, 하면탄광 출신 4명이 귀환에 성공했는데, 이 지역이 중국 접경지역이어서 탈북이 용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별기획취재팀

 

<2-3>비참한 생활상

 

 

온갖차별·대 이은 멸시...'지옥같은 삶'

 

 ◇6·25 전쟁 당시 남북 간 포로교환으로 북한 인민군에 잡혔던 국군포로들이 유엔군 장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측으로 귀환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국군포로들의 북한 억류 생활은 비참했다.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다 붙잡히면 반역죄로 총살당했고, 살아 남더라도 옥살이 끝에 기다리는 것은 탄광이나 광산의 지옥 같은 중노동이었다.

그들은 ‘해방전쟁’에 총부리를 들이댔다는 이유로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보위부의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평생을 절망 속에 ‘광산노동자’로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포로 자녀들도 대를 이어 진학과 취업에 차별을 당하며 탄광지대를 떠나지 못한 채 최하층민으로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수용소에서 탄광으로=1952년 6월 8일 유엔사와 공산 측이 체결한 포로송환 협정은 ‘포로들은 본인 의사에 따라 60일 이내에 송환하고, 송환에 영향을 미치거나 송환을 막기 위해 힘에 의한 위협의 사용을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협정은 대부분 무시됐다. 북한 측은 수만명의 포로를 억류해 탄광지대로 몰아 넣었다.

귀환포로 이삼출(76)씨는 “53년 7월 정전됐다는 소식과 함께 자강도 칠평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을 차에 태우기에 개성으로 가서 포로교환 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도착해보니 평남 성천광산이었다”며 “그래도 언젠가는 송환될 줄 알고 포로교환만 손꼽아 기다린 것이 50년이 지났다”고 말했다.

또 다른 귀환포로 허재석(74)씨는 “54년 4월 25일쯤 포로들을 평양역에서 기차에 태우기에 남한으로 송환되는 줄 알았는데 기차가 3일 만에 도착한 곳은 함북 아오지탄광의 포로수용소였다”며 “명칭을 ‘내무성 건설대’라고 붙여놨던데, 북한에 포로가 없다는 걸 선전하기 위해 이름을 바꾼 것”이라고 회고했다. 허씨는 “북한은 포로들의 노동력을 전후 복구작업에 최대한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포로를 교환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하층민의 밑바닥 삶=북한은 56년 6월 포로수용소를 폐쇄했다. 국군포로들은 형식적으로 석방돼 북한 공민으로 편입됐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그들은 직업선택이나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북한에서도 최하층 계급의 노동현장인 탄광이나 광산을 전전하며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국군포로들은 70대가 넘은 지금도 광산이나 통제구역의 공장과 집단농장에 거주하고 있다. 국가보위부에 등록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은 물론이다.

귀환포로 고을원(74)씨는 “국군포로는 가장 천대받는 계급으로, 한번 탄광에 배치받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며 ““61살이 되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소위 ‘연로보장’을 받지만, 여행증을 받지 못해 탄광지역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고 밝혔다.

허재석씨는 “북한은 1956년 내각결정 143호를 내려 국군포로에게 공민증을 준 뒤 사회로 내보냈다”며 “그 후로 공식적인 포로수용소는 없어졌지만, 국군포로 명단은 보위부 안전부 인민반 등에 통보돼 늘 감시 당했다”고 증언했다.

◆자식들도 천대=국군포로의 자식들도 대를 이어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고을원씨는 “북한에서는 군대를 갔다와야 사람으로 대접받는데, 아들 둘 모두 포로 자식이라는 이유로 군대도 대학에도 가지 못했다”며 “자식까지 대대로 탄광에서 일해야 했다”고 말했다. 허재석씨는 “내각결정 143호 대상자들은 자식들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대학이나 군대에 갈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귀환포로 서병렬씨는 “아들은 군대도 못가고 탄광에서 일해야 했다”며 “딸도 보위부의 교양서리로 뽑혔다가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사실이 들통나 취소됐다”고 회고했다.

◆폭발사고 주모자로 몰리기도=58년 함북 아오지탄광 용연갱에서 대형 가스폭발 사고가 발생해 36명이 숨졌다. 이때 국군포로 4∼5명이 주모자로 몰렸고, 이 중 백남웅씨는 공개재판을 받고 그 자리에서 총살됐다.

귀환포로 최영찬씨의 증언이다. 최씨는 “포로들이 탄광에서도 굴진이나 채탄 등 가장 힘든 중노동을 맡았기 때문에 불만도 많았다”고 말했다. 같은 탄광에 있던 허재석씨는 “아오지탄광 사고 이후 국군포로에 대한 감시는 강도가 훨씬 심해져 말 한마디만 거슬려도 보위부에 끌려갔다”며 “온 가족이 한꺼번에 끌려가기도 했는데, 일단 가면 돌아오지 않아 대부분 처형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허씨는 “함경북도 보위부 수용소는 함북 원성군 창평리에 있었다”며 “그 안에 탄광도 있고, 지역 전체가 거대한 수용소였다”고 밝혔다.

◆탈출 실패는 공개 처형=국군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하다 잡힌 경우는 대부분 처형되거나 옥살이를 한 뒤 탄광으로 추방됐다.

지난달 25일 만난 국군포로 김성태((74)씨는 “ 53년 7월 18일 함북 회령 포로수용소에서 대원들을 데리고 탈출하려다 붙잡혔다”며 “군법 69조 조국반역죄로 13년형을 선고받고 남포교화소에 수감됐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여기서도 탈출을 시도했으나 24시간 만에 다시 붙잡혀 함흥교화소에 수감된 뒤 결국 주원탄광으로 추방됐다”며 “탈출하기까지 무려 25년 동안을 강제노동에 시달리다보니 어느새 백발의 늙은이가 돼버렸다”고 탄식하며 눈물을 훔쳤다.

특별기획취재팀=홍성일·최현태·김형구· 김종수·엄형준 기자

specials@segye.com

 

<2-4>2000년 탈북한 장진환씨 회고

 

'감옥서 20년 탄광서 30년 인간이하의 대우 받아'

 

“6·25 때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힌 뒤 북한에서 20년은 감옥 생활을 하고, 30년은 탄광에서 중노동하면서 정말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지난달 24일 경기 성남시에서 만난 귀환 국군포로 장진환(75·사진)씨는 “고향의 품에 안긴 지 5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지옥 같던 북한에서의 삶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라고 말했다.

장씨가 포로가 된 것은 1951년 12월 22일 강원 횡성 전투. 장씨는 포로가 되자마자 강제로 인민군에 편입됐다. 장씨는 “포로가 된 후 처음 6개월 동안은 인민군 기마부대 식량반, 탄약반에서 잡일을 했다”며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인민군 전사자가 늘고 인력이 부족하자 포로들을 무조건 인민군에 편입시켜 전선에 내보냈다”고 회고했다.

전선으로 내몰린 지 3일쯤 됐을까. 장씨는 이대로 있다가는 반역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병사로 신분을 속인 중대장 등 포로들과 남쪽으로 탈출을 모의했다. 모의에 가담한 장씨 일행은 국군포로 출신 26명과 북한 대학생, 인민군 5∼6명 등 모두 60여명. 총으로 무장하고 어둠을 틈타 남쪽의 한국군 고지를 향해 내달았다. 한국군 고지를 150m정도를 남겨놓고 장씨 일행은 인민군 1개 대대에 포위돼 전투를 벌였지만, 수적인 열세로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의 탈출극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장씨는 “전기고문 등 갖은 고초를 겪은 뒤 포로 26명 전원에게 총살형이 선고됐다”며 “나이가 어린 나와 한 명을 제외한 24명은 선고 1시간 뒤 인민군 1개 소대에 의해 총살형이 집행됐다”고 증언했다.

장씨는 남쪽으로 귀환한 뒤 수소문 끝에 당시 총살당한 중대장 가족을 만났다. 중대장은 실종처리 돼 있었다. 장씨는 가족들에게 당시 상황을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지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장씨는 신의주교화소(교도소)로 보내져 탈출시도죄로 20년간 감금 생활을 했다. 교화소 출소 뒤에 그를 기다린 것은 강제노동수용소의 대명사인 아오지탄광이었다. 장씨는 북쪽에서 결혼해 딸 둘을 두었지만, 남쪽으로 데리고 오지는 못했다.

장씨는 “맏딸은 지방기동선전대의 도자기 공장 가수”라며 “재능이 뛰어나 포로자식만 아니었어도 평양에서 활동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장씨는 “목숨이 길어서 살아나긴 했지만 지옥 같은 삶이었다”며 “지난 50년간의 포로 생활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남=특별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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