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국군포로 조국에 돌아는 왔지만...

 

[탐사기획-잊혀진 국군포로]4회 한국에서 사는 법

 

(4-1)조국에 돌아는 왔지만…


질병 시달리고 가족 부양 막막… '고달픈 노후'

 ◇최근 귀환한 국군포로(77)가 고향마을에 새로 짓고 있는 집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다. 그의 소원은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모두 남쪽으로 데려와 새로 지은 집에서 오순도순 함께 사는 것이다. 경남=엄형준 기자
탈북 국군포로들은 50여년 만에 사선을 넘어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폐쇄된 사회주의 사회에서 평생을 탄광노동으로 살아온 이들에게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자본주의 사회인 한국에서 제2의 인생을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귀환포로 대부분은 한국 정착 후 억대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가족들의 생계 보조와 포로생활의 후유증인 각종 지병으로 고달픈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40%는 내집 마련 못해=정부는 귀환 국군포로들에게 주택과 관련, 20∼32평 규모의 아파트나 이에 준하는 주거지원비(1억2000여만원)를 지급한다.

그러나 본보가 32명의 귀환포로들을 상대로 주거형태를 조사한 결과 59.4%(19명)만 ‘자가’라고 답했고, 40.6%(13명)는 전·월세, 임대아파트 등으로 자기 집이 없었다. 자기 집이 없는 13명의 귀환포로 가운데 전세는 5명, 임대아파트는 4명, 월세는 1명이었고 친인척 집에 얹혀 사는 경우도 3명이나 됐다.

[관련기사][탐사기획-잊혀진 국군포로](4-2)2000년 귀환 70대 '잃어버린 세월' 수기 집필

[관련기사][탐사기획-잊혀진 국군포로](4-3)의료혜택 소외

[관련기사][탐사기획-잊혀진 국군포로](4-4)2001년 귀환 박종문씨 무상진료 호소

정부의 주거지원금 지급에도 불구하고 귀환포로들이 자기 집을 마련치 못한 것은 보상금을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의 탈북 비용나 가족 생계비 등으로 사용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2002년 귀환한 김모(76)씨는 보상금 3억원 가운데 7000만원만 받고 나머지는 연금(월 100만원)으로 나눠 받고 있다. 김씨는 이 가운데 북에 남은 가족을 탈북시켜 주겠다는 브로커에게 속아 5000만원을 날렸다. 자신을 탈북시키느라 돈을 쓴 동생들에게도 2000만원을 줬다. 그는 함께 탈북한 아내가 받은 정착지원금 3700만원으로 마련한 17평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월 100만원의 연금으로는 생활비가 부족해 아내가 파출부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김씨는 “최근 위암 수술을 받아 돈을 쓴 데다 아들 3명이 함께 탈북했는데 벌이가 시원치 않아 도와주다 보니 생활이 어렵다”며 “내집 마련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0년 귀환한 이모(77)씨는 남한 동생이 빌려준 수도권의 28평 아파트에 살면서 연금으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연금을 포함해 3억5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던 그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을 탈북시키려다 6000만원을 떼였고, 남한에서 재혼했다 사망한 아내의 아들한테 7000만원을 주고 나니 연금받은 돈을 제외하고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귀환 포로는 ‘봉’=귀환 국군포로들은 70∼80대의 노인들로 한국 물정에 어둡다 보니 사기 피해를 당하고, 돈에 눈이 먼 친인척에 휘둘려 돈을 떼이는 경우도 여러 건 있었다.

귀환 포로 32명 가운데 34.4%인 11명은 친인척과 불화를 겪거나 돈을 떼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귀환 포로들은 거액의 보상금을 받다 보니 남쪽의 가족들과 돈 문제로 다투는 경우가 빈발했다는 것이다.

2000년 귀환한 서모(74)씨는 지난 5년간 세번이나 결혼을 했다. 첫번째 부인은 보상금 4억원 가운데 1억3000여만원을 갖고 도망갔고, 둘째 부인도 7000여만원을 가지고 사라졌다. 서씨는 지난해 고향 후배를 만나 전세집에서 새 보금자리를 꾸렸다.

2000년 귀환한 김모(75)씨는 “남쪽에 살던 동생에게 1억5000만원을 떼였고 돈 때문에 형제들 사이도 멀어졌다”고 말했다.

박모(77)씨는 “탈북을 도와준 조카가 차를 사 달라고 조르고, 친척들은 집에 들를 때마다 수백만원의 용돈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는 탈북지원단체에도 2000만원을 빌려 줬다가 돌려받지 못했다.

◆생계 문제도 심각해=귀환 포로 가운데 ‘한국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무엇인가’란 질문에 ‘생계곤란’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6명이나 됐다.

경남의 한 소도시에 살고 있는 박홍길(78)씨 부부는 소아마비에 걸린 13살짜리 손자를 데리고 살고 있다. 6년 전 귀환한 뒤 아들 내외 등 다섯식구가 단란하게 살았으나 공장에 취직, 돈을 벌던 며느리가 가출한 뒤 실의에 빠진 아들이 막노동 현장을 전전하며 집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씨는 “보상금 3억여원 가운데 가족들 탈북 비용으로 1억1000만원, 임대아파트 보증금으로 3700만원 등을 쓰고 남은 돈으로 온 가족이 지금껏 생활해 오다 보니 앞으로 생계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유복한 생활은 소수=경기도 소도시에 살고 있는 김성태(74)씨는 돈 관리를 잘한 사례로 꼽힌다. 그는 2001년 귀환 후 4억원의 보상금을 일시불로 받았다. 김씨는 이 돈으로 아파트와 상가를 구입, 상가에서 나오는 월세(130만원)로 생활하고 있다.

특별기획취재팀


](4-2)2000년 귀환 70대 '잃어버린 세월' 수기 집필
"오지 광산서 강제노동 50년 그래도 고향갈 희망에 버텨"
 ◇한 국군포로가 자필로 작성한 수기. 6·25때 중공군에 잡혀 북한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겪은 50년간의 인생역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2000년 귀환, 수도권에 살고 있는 한 국군포로(77)는 요즘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담은 수기를 집필 중이다. 그는 북한에 아직 가족이 남아 있어 신변을 다 밝힐 수 없다며 익명을 요구했다. 다음은 그의 수기 중 일부다.

6·25 당시 5사단 27연대 소속(일병)이었던 나는 전쟁 막바지인 1953년 6월 강원도 김화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전투 중 입은 부상을 치료받은 후 평남 강동군 승호리 포로집결소로 옮겨졌다.

한달쯤 지난 어느 날 밤 평양쪽 하늘에 불꽃이 솟아올랐다. 인민군 장교에게 물으니 “휴전을 축하하는 축포”라는 것이었다. 1개월만 버텼으면 포로 신세가 되지 않았을 텐데.

마음이 조급해져서 인민군 장교에게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당신들은 국제법대로 처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감시가 심해지더니 갑자기 평남 성천으로 이동시켰다.

2개월 후 다시 이동한 곳은 평북 철산군에 있는 광산. 송환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광산노동자 신세가 됐다. 깊은 갱 내에 들어가서 채굴한 광석을 쇠광차에 실어 내오는 힘든 중노동이었다. 식사도 변변치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고향에 갈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일했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나는 측량기술을 배워 광산기술자가 돼 시골처녀를 만나 결혼도 했다. 다시 함남 검덕광산과 동암광산으로 옮겨 각각 20년씩 40년을 보내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출신성분 탓에 당원도 될 수 없었다. 결혼은 했지만 생활은 너무 어려웠다. 아내는 1994년에 약 한첩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1996년 기근은 너무 가혹했다. 한끼 먹기도 힘들었다. 염소 한마리를 길러 젖을 짜서 겨우 하찮은 목숨을 부지했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방북하는 김대중 대통령이 혹시 ‘국군포로 송환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감격적인 상봉을 하는 TV모습을 보고 이제는 남과 북이 원수가 아니구나, 포로들이 50년 한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는 절박한 심정에 두만강을 건너는 목숨을 건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4-3)의료혜택 소외
"전투중 다친것 아니다” 의료비 지원 안해줘
 ◇경남의 한 소도시에 살고 있는 귀환 포로 박홍길(78)씨 부부가 아들 대신 돌보고 있는 소아마비 손자(13)와 한때를 보내고 있다. 경남=김종수 기자
귀환 국군포로들은 대부분 몸이 성치 못하다. 6·25전쟁 때 부상하고 북한 억류 중 탄광에서 다친 곳이 많아 거동이 불편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은 전투 중 다쳤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거나 전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귀환포로들은 탈북자들에게 주어지는 무상 의료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유공자에서 참전유공자로=국군포로들은 한국으로 귀환하면 ‘탈북자’가 아닌 ‘대한민국 군인’의 지위를 인정받는다. 1999년 1월 제정된 ‘국군포로 대우 등에 관한 법률’(이하 국군포로법)에 따라 귀환포로들은 ▲봉급 ▲연금 ▲주거지원비 ▲특별지원금 등을 받는다. 보상금 외에 특별한 명예나 복지혜택은 거의 없다.

귀환포로들은 6·25 당시 대부분 전사자로 잘못 처리돼 남쪽에 남아 있던 가족들이 대신 국가유공자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살아 돌아오면 국가유공자 자격은 없어지고 참전 제대군인은 누구나 해당되는 ‘참전유공자’로 자격이 바뀌어 수당 등 혜택이 줄어든다.

참전유공자는 월 6만원의 참전수당과 보훈병원 진료비 50% 할인혜택, 장례비 15만원 지원, 호국용사 묘지 안장 등 혜택을 받는다. 국군포로가 국가유공자가 되려면 훈장을 받았거나 전쟁 때 상해를 당했다는 증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의료비 지원 없어=귀환 국군포로들은 노후 생활의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지병을 꼽았다. 취재진이 만난 32명 가운데 절반인 16명이 건강이 나쁘다고 답했고, 건강 상태가 양호하다는 사람은 31%(10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병원을 자주 찾아야 하지만 의료비 지원은 기대하기 힘들다. 참전유공자의 경우 전국의 5개 보훈병원에서 진료비 50%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노구를 이끌고 멀리 떨어져 있는 보훈병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

무공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는 보훈병원에서 진료비의 60%를 할인받는다. 전상군경(상이군경)이 되면 보훈병원뿐 아니라 전국의 172개 지정병원에서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 귀환포로들은 전쟁 중 다쳤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어 이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포로 때 부상 인정 못 받아=노사홍(76세)씨는 포로생활 중 탄광 붕괴사고로 척추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었다. 그 후 허리 마비증상에 시달고 있지만 귀환해서도 상이군경 처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노씨는 “보훈처에 문의했더니 상이군인 처우가 안된다는 답변을 들었다”며 “이 생각만 하면 내가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명예심이 사라진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5월 귀환한 이순옥(77)씨는 군 입대 직후인 1950년 7월 타고 있던 수도사단 병력수송 차량이 전복돼 다친 후유증으로 지금껏 다리를 절고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씨는 귀환한 뒤 보훈처에 상이군경 신청을 했지만 당시 야전병원에서 치료받은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씨는 “보훈처에 갔더니 야전병원 치료기록이나 당시 전우라도 찾아오라고 했다”며 “육군본부 인사과에는 기록이 있을 법도 한데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에 대해 보훈처 관계자는 “당시 야전병원의 치료 기록도 없고 군 동료의 증언도 없다면 상이군경 판정을 받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무상 의료혜택 절실=국군포로들은 상해 여부와 상관 없이 5년간 의료급여 1급 혜택을 받는 탈북자들과 달리 이 혜택이 없다. 의료급여 1급은 대수술을 제외한 대부분의 의료비를 면제받는다. 탈북자들은 5년이 지난 후에도 생활이 어렵거나 장애가 있을 경우 계속 의료급여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귀환포로 이삼출(76)씨는 오랜 탄광생활로 생긴 규폐증과 암수술 후 진료를 위해 한달에 2∼3번씩 집에서 차로 1시간 넘게 걸리는 보훈병원을 찾는다. 이씨는 “할인을 받아도 치료비가 20만∼30만원씩 나와 보훈병원 말고 다른 병원은 갈 엄두도 못낸다”며 “탈북자도 받는 의료혜택을 왜 국군포로에게는 안 주느냐”고 말했다.

국방부는 귀환포로들의 건의를 받아 지난해 ‘국군포로대책위원회’에서 지원방안을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국방부 대북정책과 관계자는 “복지부 등 관련 부처에 의견을 구했지만, 국군포로는 극빈층이 아니라 지원이 곤란하다는 입장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관련법에 예외조항을 둔다면 국군포로의 의료급여 지정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며 “귀환포로가 소수이다 보니 의료 혜택 지원을 위한 여론 형성이 안 되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현재 기초생활보호대상자 외에도 독립유공자, 중요무형문화재 등이 의료급여 1급대상자로 지정돼 있다.

](4-4)2001년 귀환 박종문씨 무상진료 호소
"제대로 치료나 한번 받아봤으면”
 ◇박종문씨가 6·25전쟁 당시 포로로 잡힌 뒤 이동 중 포탄 파편을 맞아 생긴 다리의 상흔을 보여주고 있다.
“50년 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죽을 고생을 했는데 이젠 제대로 치료나 받았으면 합니다.”

2001년 귀환한 국군포로 박종문(79)씨. 지난달 26일 경남 창원시 복지원에서 만난 그는 취재팀에게 다리의 긴 흉터를 보여주며 부상 당시 고통스러운 순간이 떠오르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박씨는 1952년 7월 강원도 철원에서 전투 중 북한군에 포로가 된 뒤 이동 중에 포탄 파편이 다리에 박히는 중상을 당했다. 그 바람에 신경을 크게 다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처지다.

다리 부상을 감안해 그나마 쉬운 일터인 함북 온성군의 광산 탐사대에서 일하게 됐지만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그는 이곳에서도 기계수리 작업 중 오른손 검지 끝마디가 잘리는 부상까지 당했다.

그는 “지하에서 수십년 동안 일한 탓인지 기관지가 상해서 요샌 말하기도 힘들다”며 “다리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를 좀 받고 싶은데 일반 병원은 진료비가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낸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심지어 “나같이 아픈 국군포로들은 무료 진료 혜택이 무엇보다 절실하다”면서 “멀리 있는 보훈병원까지 가지 않더라도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아픈 곳을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없느냐”며 취재진의 손을 꼭 잡았다.

박씨는 마지막으로 고향 땅에 뼈를 묻겠다는 일념 하나로 2001년 아들과 손자 손을 꼭 쥐고 사선을 넘었다. 하지만 50여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는 그들을 반겨주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입대 전에 결혼한 처를 수소문했으나 이미 오래전에 재가했다는 소식뿐이었다.

박씨는 “내가 포로가 된 뒤 군대에서 전사통지서를 집으로 보냈나봐. 아내가 아이를 하나 낳는데 그 애마저도 전쟁 통에 죽으니까 다시 결혼해서 지금 서울서 산다”며 “너무 보고 싶어서 한번 만났는데 ‘아이만 죽지 않았어도 재가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미안해하더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근에는 함께 탈북한 아들이 재혼하면서 분가하자 박씨는 자신의 정착금으로 아들이 살 집까지 마련해 줘야 했다. 한 달에 60만원 정도 되는 생활비는 매달 정부에서 받는 연금으로 겨우 충당하고 있다.

현재 그는 조그만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쓸쓸하게 노후를 보내고 있다. 하루종일 집에 혼자 있기가 심심해서 아침부터 노인요양시설에서 소일하다 문닫을 때쯤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박씨는 “아들 집이 그리 멀지 않아서 일 끝나면 애들이 내 집에 가끔 들른다”고 말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창원=특별기획취재팀



트랙백 주소 : http://blog.segye.com/tb.php?blogid=htchoi&id=6409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