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북한포로 육군중위 '52년만의 귀환'

 

장선생씨 선양영사관서 조국행 대기중

지난6월 탈북…조창호씨 이래 장교론 최고위

"죽어도 고향에서…" 두번이나 사선넘었다

 ◇지난달 16일 장선생 중위가 탈북 후 숨어지내고 있던 중국 옌지시내의 한 아파트에서 취재팀을 만나 탈북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옌지=특별기획취재팀
6·25전쟁 중 중공군에 붙잡혀 북한에 억류됐던 육군 중위 출신 국군포로가 52년 만에 탈북에 성공했다.

10일 국방부 등에 따르면 육군 중위 장선생(張善生·78·본적 충북 충주시 용탄리·군번 123990)씨가 지난 6월14일 탈북,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시의 한 아파트에 은신하다 중국 선양(瀋陽) 한국영사관의 안전가옥으로 옮겨져 한국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장교 출신 국군포로가 탈북에 성공하기는 1994년 조창호 소위 이래 11년 만이다. 조씨 이래 50명의 포로가 귀환했으며, 조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병 출신으로 중위는 귀환 국군포로 중 가장 높은 계급이다. 장씨는 그간 탈북을 도운 브로커들이 수고비 명목 등으로 ‘몸값’ 수천만원을 요구하는 바람에 은신처에 20여일간 억류돼 있다가 최근 한 인권단체가 몸값을 제공, 가까스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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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는 2003년에도 중국 허룽(和龍)으로 탈출했으나 몸값을 마련치 못해 한국 입국에 실패했다. 장씨가 이번 달 한국에 입국하면 휴전 후 탈북, 귀환한 국군포로는 모두 51명으로 는다.

이에 앞서 취재팀은 장씨가 탈북한 지 이틀 뒤인 6월16일 중국 옌지에서 현지 브로커를 통해 장씨를 만나 탈북사실을 확인했지만, 장씨의 신변안전을 고려해 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장씨는 취재팀에 전쟁 당시 부상을 입은 오른쪽 다리의 상흔을 보여주며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장씨는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몹시 허약했고, 다리 부상 악화로 거동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또 오랜 탄광생활에 따른 후유증으로 청력을 상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장씨는 확인 결과 1927년 8월7일 생으로 서울 덕수공립상업학교 재학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광주포병학교 간부후보생으로 입교한 뒤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휴전 직전인 1953년 7월 강원도 김화지구 전투에 관측장교로 참가했다가 부하들과 함께 중공군에게 포로가 됐다. 장씨는 포로가 된 뒤 함북 은덕군 은덕읍 아오지탄광 등에서 30년 동안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장씨의 남측 가족들은 휴전을 사흘 앞둔 1953년 7월24일쯤 장씨의 실종 사실을 통보받았으며, 이후 장씨는 전사자로 처리돼 현재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장씨는 5남매 중 장남으로 현재 서울에 선광(71·강동구성내2동)씨 등 남동생 2명과 미국에 여동생 2명이 살아 있다. 북한에도 부인과 사이에 7남매를 두고 있다. 형의 탈북 소식을 들은 선광씨는 “명절 때마다 형님 밥을 따로 떠 놓고 살아 돌아오기만 학수고대했는데 형님이 탈북에 성공했다니 꿈만 같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특별기획취재팀

specials@segye.com

 
포로에서 북한 탈출까지
 ◇탄광에서 동료들과 북한에 억류됐던 장선생(윗줄 맨 왼쪽)중위가 지난해 3월 본인의 생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서울의 가족에게 보낸 사진. 사진 뒷면에 ‘아탄에서 1956. 7.1’이라고 적혀 있어 당시 북한 아오지 탄광 동료들과 찍은 기념사진으로 추정된다. &장선생씨 가족 제공
‘중위 장선생’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위패봉안관 검은색 대리석 현판에 또렷이 새겨져 있는 6·25전쟁 전사자의 이름이다.

‘육군 11야포단 72대대 소속 군번 123990’

죽었던 그가 살아서 돌아왔다.

1953년 7월 강원도 김화지구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후 아오지탄광등을 전전하며 평생을 보낸 20대의 젊은 육군중위가 부상과 강제노동으로 만신창이가 된 노구를 이끌고 사선을 넘어 52년 만에 조국의 품에 안긴 것이다.

◆첫번째 탈북은 실패=장씨가 죽어도 고향에서 눈을 감겠다는 일념으로 첫 번째 탈북을 시도한 것은 2년 전인 2003년 5월. 6·25전쟁 중 입은 오른쪽 정강이 부상이 악화돼 제대로 걸음도 떼지 못하는 그였지만 “남한에 사는 가족을 찾아주겠다”는 브로커의 말만 믿고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허룽에 도착한 장씨는 서울에 살고 있는 동생 선광씨와 ‘전화 상봉’에 성공했다. 그러나 장씨가 귀가 어두워 동생과 제대로 통화할 수 없었다. 게다가 브로커가 수천만원의 탈북비용을 요구하자 선광씨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1차 탈북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북한으로 돌아온 장씨는 그러나 귀향의 꿈을 버지리 못했다. 장씨는 지난해 3월 인편을 통해 다시 아오지탄광에서 찍은 빛바랜 흑백 사진과 부모 형제 이름이 깨알같이 적힌 편지를 동생에게 보냈다.

형님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한 선광씨는 곧바로 국방부 등에 “(형님이) 조국과 가족의 품에 돌아올 수 있도록 사전 만반의 조치를 강구해 달라”고 진정서를 내는 등 형의 귀환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생활이 궁핍한 그로서는 믿을 곳은 정부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국군포로 탈북 경비를 지원할 근거가 없으니 가족이 알아서 하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정부 무관심으로 한때 북송 위기=실의에 잠겨 있던 장중위에게 브로커가 다시 찾아온 것은 지난 6월 초. “중국 옌지까지만 오면 뒤를 봐줄 테니 국경을 넘으라”는 브로커의 말에 지난 6월 14일 새벽 아들 등에 업혀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북한 탈출에 성공한 장씨는 브로커들이 마련한 옌지 시내의 한 아파트에 숨어 있었다.그러나 남쪽 가족들이 브로커가 요구하는 수천만원에 이르는 수고비 명목의 ‘몸값’을 마련치 못하는 바람에 이곳에서 20여일간 불안한 인질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정부는 탈북 직후 이 사실을 알았으나 장씨의 신변 안전 확보와 송환을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장씨는 한때 중국 공안당국에 발각될 것을 우려한 브로커들에 의해 강제 북송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장씨 귀환을 추진했던 민간단체 관계자는 “장씨가 탈북한 지난 6월14일부터 국방부를 여러 차례 찾아가 가족들이 형편상 몸값 마련이 어려우니 이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며 “하지만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북한 브로커들이 몸값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장씨를 다시 북으로 데려가겠다고 협박했다”며 “안면이 있는 조선족 브로커에 사정사정해서 북한 브로커에게 몸값 일부를 대신 주도록 해 가까스로 강제 북송을 막았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보름 넘게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본지의 탐사기획 ‘잊혀진 국군포로’ 시리즈가 보도(6월 21∼27일)된 뒤인 6월 말쯤 장씨 동생 집을 방문, “몸값을 해결하라”고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선광씨는 “6월 말쯤 국방부 관계자가 집으로 찾아와 몸값을 마련하라고 요청했다”며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정부가 나서 달라고 요청했지만 규정상 어렵다는 대답만 들었다”고 밝혔다.

북송 위기에 처했던 장씨는 이번달 초 국내 한 인권단체가 2000만원의 몸값을 마련, 지불한 다음에야 천신만고 끝에 중국 내 한국영사관 측에 인계될 수 있었다.

◆포로에서 탈북까지 52년=장씨는 휴전을 앞둔 1953년 7월 강원 김화지구전투에 관측장교로 참전했다가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장씨는 당시 오른쪽 정강이에 포탄 파편이 박히는 큰 부상을 당해 평생을 절룩거리며 살고 있다.

포로로 잡힌 장씨가 끌려간 곳은 악명 높은 함북 아오지탄광. 장씨는 아오지탄광에서도 가장 힘든 굴진·채탄 작업을 하며 30도가 넘는 갱도에서 30여년간 중노동에 시달렸다. 열악한 작업환경과 혹독한 노역으로 장씨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고, 청력도 거의 상실했다.

장씨는 61세에 ‘연로보장’을 받고 서야 악몽 같은 탄광 노동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씨는 이후 함북 청진으로 옮겨졌고, 국경지역을 넘나드는 보따리상 등을 통해 남한 소식을 들으며 귀환의 꿈을 키워왔다.

특별기획취재팀 홍성일·최현태·김형구·김종수·엄형준 기자

specials@segye.com

 
 
취재하기까지
억류브로커에 수고비 건넨뒤 장중위 만나
취재팀 중국공안 오인 한동안 말문 안열어
지난 6월16일 중국 조선족 자치구인 지린성 옌지시의 한 허름한 아파트. 취재팀이 방으로 들어서자 TV를 통해 남한 방송을 지켜보던 국군포로 장선생(78) 중위는 깜짝 놀라듯 움찔 뒤로 물러섰다. 취재팀을 중국 공안당국이나 북한 보위부 관계자로 안듯 했다. 장씨는 한동안 말문을 열지 않다가 브로커가 “남측 가족들이 보낸 사람”이라고 설명하자 그제서야 입을 뗐다.

취재팀이 이에 앞서 한 관계자에게서 “국군포로 장교 1명이 오늘 새벽 두만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이틀 전인 6월 14일. 취재팀은 부랴부랴 중국으로 출국했다. 중국 옌지에서 수소문 끝에 장씨를 억류하던 조선족 브로커를 어렵게 찾아냈다. 취재팀을 장씨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러 온 남측 가족 대리인으로 소개하고 수고비까지 건넨 후에야 장씨를 만날 수 있었다.

장씨는 취재팀에게 국군포로임을 확인시키려는 듯 오른쪽 정강이의 10cm가량의 흉터를 가리키며 “포로로 잡힐 때 포탄 파편이 박힌 상처인데 요즘 계속 붓고 있어 걷기조차 어렵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영양 섭취를 못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장씨는 노령으로 귀가 좋지 않고 발음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장씨는 “하루빨리 꿈 속에서도 그리던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취재팀이 장씨에게 북한에서의 생활을 더 물었으나, 브로커가 더 이상 대화를 못하게 끼여드는 바람에 취재팀은 아쉬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장중위 입국하면
일계급특진 대위 전역… 51번째 귀환포로
장선생 중위는 한국에 입국하면 국정원의 조사 과정을 거쳐 소속 사단에서 전역식을 갖고 예편하게 된다. 장씨는 다른 귀환포로들의 전례에 따른다면 일계급 특진돼 대위로 전역할 가능성이 높다.

1994년 첫 귀환한 조창호(75)씨는 당시 육군소위였지만 탈북 등의 공로가 감안돼 중위로 전역했다.

장씨가 입국, 전역하면 ‘국군포로 대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봉급 ▲연금 ▲주거지원비 ▲특별지원비 등 보상금이 지급된다. 보상금은 계급과 근속연수 등에 따라 다르지만 본지가 국내에 정착한 귀환포로 32명을 조사한 결과 1인당 평균 3억50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봉급은 포로가 된 시점부터 전역하는 시점까지 월급을 합산하고 수당을 더해 지급한다. 월급, 연금과 별도로 20평 이상 규모의 아파트나 이에 준하는 주거지원비(통상 1억2000만원)가 지급된다. 이를 모두 합할 경우 귀환포로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인 장씨는 최소한 5억원 이상의 보상금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귀환포로는 그간 모두 51명으로 장씨와 조씨 2명을 제외한 49명은 사병 출신이다.

본지가 귀환 포로 32명을 계급별로 조사한 결과 이등중사(현재 병장)가 20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일등병 6명, 이등병 4명, 하사(현재 상병) 1명, 소위 1명 순이었다. 귀환 포로 중 장교 출신이 드문 것은 병사들보다 숫자가 적기도 하지만 더 심한 감시와 차별을 당한 탓이다.

 

 

서울사는 동생 선광씨

"돌아가신 아버지 그대로…정말 우리형님이 맞네”
“형님 얼굴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쏙 빼 닮았네. 그리고 말하는 모습을 보니까 정말 우리 형님이 맞네….”

국군포로 장선생씨의 동생 선광(71·사진)씨는 10일 서울 강동구 성내2동 집에서 취재팀이 지난달 중국 현지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해온 형님의 인터뷰 동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장씨는 “50년도 더 됐지만 형과 동해안에 놀러가 조개를 따고 같이 놀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장씨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형의 얼굴이 비춰지는 노트북을 바라보다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선광씨는 “한국전쟁 휴전을 불과 사흘 앞두고 군의 통지를 받았는데 형이 전투 중에 실종됐다는 내용이었다”며 “전사가 아니라 실종이어서 반드시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는 장남이 살아 돌아올 것으로 믿고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고 수년 동안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도 하셨다”며 “명절 때는 형님 밥상을 따로 차리고 차례를 지냈고, 매년 현충일에는 가족들이 위패가 모셔진 국립현충원을 찾기도 했다”고 말했다.

선광씨는 “중풍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25년 전에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형을 찾으셨다”며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한 형님만 곁에 계셨어도 우리 가족이 전쟁 직후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덜했을지 모른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선광씨는 “형님이 귀국하시면 곁에서 모시겠다”며 “북에서 너무 고생하고 못 드셔서 빼빼 마른 것 같은데 끼니를 제대로 챙겨드리고 한국 생활 적응도 적극 돕겠다”고 말했다.

특별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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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가서 얼굴에 주름살이 세월을 말해주는 이제서야 고국에 오셨군요 그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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