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위의 삼성'(?) - 세계일보 블로그


안기부의 불법도청 테이프 내용이 공개된 이후 이른바
X파일 사건이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삼성그룹 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주미대사에 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 천용택 전 안기부장,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과거 권력 핵심층의 이름이 언론매체에 큼지막한 활자로 오르고 있다. 급기야는 97년 대선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등장했다. 드라마로 치자면 초호화급 배역이 한꺼번에 출연하는 셈이다.

 

<참여연대가 서울중앙지검에 제출한 고발장(연합뉴스 펌)>

 

 

정치권과 언론의 흐름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한쪽은 국가정보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행위인 도청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테이프 녹취록에 들어있는 삼성과 홍 대사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 의혹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전자에는 한나라당과 중앙일보가 서 있고, 후자에는 열린우리당-민노당과 MBC, 진보 성향의 인터넷언론과 시민단체들이 대표주자이다. 상당수 신문사와 방송사는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기보다는 굳이 어느 편에 줄을 설 필요가 있나 라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참여연대의 고발에 따라 수사에 나선 검찰은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공안부에 배당했다. 국가정보기관이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건이고 선거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다. 이에 참여연대가 문제제기를 했고, 진보 성향의 언론매체들은 검찰이 불법도청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니냐며 불만을 표시하는 멘트를 모아 기사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이 불법도청만 수사하고 테이프 내용의 진위와 더불어 불법대선자금 제공을 수사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소홀히 하리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견이다. 고발내용에 불법 선거자금 제공 및 뇌물 의혹이 포함되어 있는데다, 녹취록에 들어있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불법이고 공소시효 문제도 따져봐야 할 부분이 있어 어물쩍 넘어가기는 힘든 사안이라는 것은 굳이 법률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건 배당만을 놓고 검찰의 수사 의지를 예단하는 것은 성급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수사가 상식과 순리에서 벗어난다고 판단될 때 비난을 퍼부어도 결코 늦지 않다.

 


<X파일 수사를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청사> 


  이 대목에서 필자가 제기하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을 과연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느냐는 시각의 문제다. 일부 언론매체의 헤드라인과 일부 기자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마치
삼성과의 전쟁을 작심한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번 기회에 삼성을 손보지 않으면 나라에 큰 문제가 생길 것처럼, 평소 삼성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의견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국가위의 삼성 삼성공화국이라는 표현으로 삼성이 정부 이상의 위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띄우면서 이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삼성의 반노조 정책과 경영권 세습에 반감을 갖고 있는 진보 진영으로서는 이번에 (삼성이) 제대로 걸렸다 삼성의 본모습이 마침내 드러났다고 할 만하다. 테이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삼성은 테이프 녹취록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부인을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경험칙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렇지만 테이프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리 놀랄 수준은 아니다. 여기서 놀란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대수롭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사건이나 1996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등과 같이 재벌과 정치권 핵심층이 불법자금으로 연결된 정경유착사건의 하나라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과거 수많은 불법정치자금 또는 뇌물사건에서는 재벌이나 중소기업주가 권력자나 고위공직자에게 돈을 어떤 목적에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줬는지를 엿볼 수 있는 도청 녹취록이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X파일 사건은 불법도청 녹취록을 통해 마치 정치자금 제공의 현장이 라디오 중계를 하듯이 공개된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해왔구나 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정치판에 발을 들인 많은 사람들이 내막이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그렇게 했지 않았겠어라고 생각했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개연성이 현실화한 것이다.

 


한번 생각을 해보자. 그동안의 수많은 뇌물과 불법정치자금 사건에 등장했던 기업주들이 청와대로, 국회로, 정부기관 청사로 돈 보따리를 전달했을 때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적게는 수억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을 전달하면서 기업 내부에서 머리를 굴리고 좌우를 살피면서 요모조모로 주판을 튀겨봤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때는 특정 사안에서 이권이나 편의를 기대하고, 어떤 경우에는 불리한 내용의 폭로를 입막음 하기위해, 대선을 앞두고는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드문 경우겠지만 미래의 도움을 기대하는 등등의 이유로 돈을 건넸을 것이다. 한마디로 소액의 정치자금이 아니라면 이유없는 기업의 돈은 없었다고 본다. 또 삼성 외 다른 대기업들도 97년 대선 당시 유력한 후보들에게 거액의 대선자금을 비슷한 생각으로 전달했을 것이다. 아니 97년 대선에만 그랬을까? 2002년 대선과 97년 대선에 그랬던 것처럼 92년 대선 때도,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액수의 불법 정치자금을 건넸을 것이다.                                                         

 

<서울 태평로의 삼성 본관>

 

다만 이번 사건이 과거의 사건과 차이가 있는 것은 언론사주의 불법 대선자금 개입의혹이다. 대선과 같은 큰 게임에서 언론사는 일종의 심판 또는 관전자이다. 그런 언론의 사주가 대선자금 전달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은 충격적인데다, 그 과정에서 전달자의 의중까지 엿볼 수 있는 내밀한 대화내용이 공개된 점이 예전의 불법 대선자금이나 뇌물사건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그동안 수없이 있었던 뇌물이나 불법정치자금 사건처럼 철저히 조사해서 처리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삼성이라고 해서 가혹한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며, 봐줘야 할 일은 더더욱 없다. 여느 사건처럼 법적 절차에 따라 수사해서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삼성이 대한민국을 쥐고 흔드는 것처럼 과대포장하고, 검찰에 속칭 삼성장학생이 엄청나게 포진해 있어 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는가 라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듯한 태도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특검에 수사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옳다. 이번 사건은 공개된 녹취록에 삼성이 검찰 간부들을 돈으로 관리해온 듯한 내용이 들어있는 만큼 검찰이 수사하기에 부적절한 측면이 있다. 빠른 시일 내 특검에게 사건을 넘기는 것이 뒷말이나 오해의 여지를 줄이는 깔끔한 방법이라고 본다.

<민노당원 등이 안기부 불법도청 녹취록 공개 이후 삼성 본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또한 언론이 왜 삼성을 물어늘어지지 않는가라며 삼성의 로비를 받았거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들이대는 일부 매체와 평론가들의 논조에는  왠지 거부감이 든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모든 신문과 방송이 똑같은 기사를 비슷한 제목이나 크기로 보도를 해야 제대로 보도를 하는 것이다. 또 현장에서 나름대로 새로운 기사거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일선기자들의 노고는 도외시한 채 언론 매체들이 왜 이 사건을 제대로 파헤치지 않는가 라며 평가절하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삼성의 로비 때문이 아니냐는 식이다. 물론 삼성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제작에 임하는 매체도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시각과 판단이 존재하고, 그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으면 서로 존중을 하는 것이 민주적인 사고방식이다. 각자의 양식과 판단에 따라 상품을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옳고 그른지는 결국 독자와 시장이 평가하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풍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혹시라도 삼성을 두둔하는 것으로 오해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아 사족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졸고는 이 사건이 불거진 이후 목소리 큰 사람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 마땅치 않고, 다양한 시각이 혼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소견을 적어본 것이다. 개인적으로 삼성을 감싸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럴 의사도 없음을 밝힌다.

 

 


721일은 기자들에게는 한여름의 대목이었다. 굵직한 뉴스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졌기 때문이다. 뉴스 거리가 쏟아져 기사 걱정은 없었지만, 어느 지면에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머리를 싸맺을 것이다. 우선 군부대 총기탈취-도주사건이 진행중인데다, 이른바 이상호 X파일이 조선일보의 보도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거기에다 언론에서 딸들의 반란으로 이름붙인 종중땅 관련소송에서 대법원이 40여년만에 판례를 뒤집고 하급심 판결을 파기함으로써 결혼한 여자도 종중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게 됐다. 관습법이 최고법원의 판결에 의해 변경된, 여성계로서는 반가운 뉴스가 아닐 수 없다. 경제쪽에서도 근래 보기드문 일이 벌어졌다. 총수 일가의 우애가 각별한 것으로 알려진 두산그룹에서 명예회장이 최근 총수로 취임한 박용성 회장의 비리의혹을 직접 폭로한 것이다. 해외에서도 큼직한 뉴스가 날아들었다. 영국 런던에서 지하철 폭발사건이 발생해 CNN을 비롯한 전 세계 언론이 긴급뉴스로 다뤘고, 중국이 마침내 위안화를 평가절상하면서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환율정책을 변경했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야말로 빅뉴스이다.

 

                            <미디어오늘에서 퍼온 X파일 그래픽>


 

필자가 사회부 기자 초년병 시절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89 7월로 기억되는데, 임수경씨가 북한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날 대한항공기가 리비아 트리폴리 공항에서 추락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날 울릉도 부근에서 헬기가 추락해 10여명이 숨졌지만, 워낙 큰 사건에 밀려서 크게 취급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많은 뉴스 가운데도 단발성이 있고, 앞으로 계속 진행되는 진행형 뉴스가 있다. 진행형 사건의 대표적인 것이 한동안 언론 관련 미디어에서 이상호 X파일로 표현했던 안기부의 불법도청 테이프 사건이다. 이 사건은 뉴스거리로서 언급되는 각종 요소를 두루 포함하고 있다. 우선 등장인물이 초호화급이다. 국내를 대표하는 대기업집단의 핵심인사와 유력 중앙일간지 사주가 주역이다. 테이프에는 이 대기업집단의 회장도 언급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거기에다 문제의 테이프를 만든 곳이 국내 최고 정보기관인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의 비밀도청팀이고, 테이프가 불법 도청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불법 도청한 테이프에 녹음된 내용이 97년 대선을 앞두고 대표 재벌과 대선 후보들간 대선자금과 관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구나 이 사건은 MBC가 문제의 테이프를 입수하고도 장시간 미적거리는 사이에 조선일보가 첫 보도를 낚아챈 것으로, 평소 불편한 관계인 양사간 경쟁도 뉴스 관전의 재미를 더하게 하는 요소다.

 

관전자로서는 이 사건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이고, 어떤 점이 관전포인트인지 짚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사건을 직접 취재하는 기자들로서는 피말리는 경쟁의 연속이고, 때로는 보도의 방향과 가치를 놓고 심사숙고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골치아픈 사건이지만.

 

이런 류의 사건이 터지면 으레 나오는 것이 진상규명 요구이다. 처벌 여부는 차치하고 진상부터 가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언론,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에서 터져나오기 마련이고, 네티즌들도 이에 가세하게 된다. 다행히 당사자의 하나인 국정원이 진상규명 조사에 나서겠다고 발표를 했기 때문에 불법도청에 대한 조사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사의 핵심주체는 역시 검찰이다.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검찰이 나서야 하지만, 복병이 있다. 바로 공소시효의 문제다.

 

<문제의 테이프에 등장하는 대기업집단측 변호인이 서울남부지원에 보도금지가처분신청을 낸 후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검찰 간부들이 사회적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늘상 검찰은 의혹을 해소하는 기관이 아니다 의혹만 갖고 수사에 들어갈 수는 없다 검찰은 불법행위자를 가려내 처벌하는 기관이다 등의 말로 시간을 끈다. 이렇게 전후좌우를 살피는 시간을 번 다음 광범위한 정보 수집을 통해 사건의 성격을 가늠하면서, 향후 수사에 대비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사건을 보면 불법도청이라는 불법행위의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에 검찰이 의혹만 갖고 수사하기는 곤란하다는 말로 버티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불법도청과 불법 정치자금 제공 모두 공소시효가 종료된 것으로 보이는 점이 검찰로서는 시간을 벌기위한 핑계거리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치권 일각에서(97년 대선의 유력후보 진영이었던 정당은 목소리를 높이고 어려울 것으로 예상됨)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사회적 여론이 수사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몰리게 되면 검찰도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 것이다. 공소시효 문제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불법도청 자체는 시효가 소멸됐다고 하더라도 비밀준수 의무가 있는 안기부 직원이 기밀(불법을 폭로한 것이 비밀누설에 해당하는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을 누설한 시점이 언제인지, 해외에 도피했을 경우 공소시효 진행의 정지 여부 등 법률적으로 따져봐야 할 점이 많다. 또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불법도청된 내용을 공개한 행위의 위법성 문제도 있다. 따라서 불법행위자의 처벌 가능여부는 수사를 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공소시효 도과를 이유로 수사를 미루기는 힘들지 않을까 추측된다.


다음은 수사 또는 진상규명 여론의 초점이 어디에 모아질까 하는 점이다. 불법 도청에만 국한할 것인지, 아니면 도청의 대상이었던 인물의 대화내용에 포함된 불법행위 의혹까지 확대할 것인지 하는 문제다. 재벌이나 유력 보수일간지에 호의적이지 않은 언론 매체와 시민단체, 정당은 불법도청이라는 수

단보다는 도청 대상의 대화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지만 불법도청과는 달리 녹음 테이프 안에 등장하는 97년 대선자금까지 수사를 확대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여러가지 논점을 안고 있다. 우선 불법적으로 도청한 테이프를 토대로 대화내용에 포함된 불법행위 의혹을 수사해 처벌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92년 대선 직전 부산 초원복집 사건이 있었지만 당시는 불법도청한 정주영 후보측 인물들만 처벌을 받았다. 눈치빠른 사람들은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외국의 비슷한 사건의 판례를 찾기 시작했을 것이다. 또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97년 대선 당시의 불법 정치자금을 파헤치는 것이 적절한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일부에선 뇌물죄의 경우 공소시효가 남았다는 주장을 펴지만, 외견상 뇌물죄를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02년 대선자금을 수사한 전례가 있긴 하지만 97년 대선자금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고, 2002년 대선 불법자금 수수로 처벌받은 사람들이 거의 다 풀려난 마당에 8년 전 대선자금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다분히 있다.

 

 

정치권과 언론이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룰지도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알다시피 국내를 대표하는 이 재벌의 파워는 막강하다. 이 대기업집단의 대표기업은 국제신인도가 대한민국보다 높을 정도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는 초일류기업이다. 더구나 이 대기업집단의 로비력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여서 OO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권 쪽에서는 막강한 후원자이고, 언론사 입장에서는 유력 광고주이다. 따라서 정치권과 언론이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지켜보면 과연 이 재벌의 로비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체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당사자도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했는지, 언론사를 상대로 한 소송을 불사하겠다며 무분별한 취재경쟁에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 언론사로서는 이 사안을 섣불리 다루기는 어렵다. 자칫하면 거액의 소송을 당할 수 있는데다 유력 광고주까지 잃는 아픔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부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이 재벌이 유력 광고주이기 때문에 기사 자체가 왜곡되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만인이 주시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언론사간 보도의 미묘한 차이도 빼놓을 수 없는 관전포인트이다. MBC가 테이프를 들고 만지작거리는 사이에 조선일보가 치고 나온 사건인데다, 유력 일간지 사주가 개입되어 있고, 방송사와 보수 언론사간 미묘한 알력이라는 함수가 내재되어 있어 각자 이 사건을 어떤 방향과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분석거리다. 불법도청에 초점을 맞출지, 아니면 대화내용에 들어있는 불법 대선자금 의혹에 포커스를 둘지에 따라 타격을 받는 쪽이 확연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아직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지만, 문제의 테이프를 언론사에 제공한 쪽의 숨은 의도도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일부 보도에 의하면 MBC가 테이프를 입수한 이후 보도를 놓고 망설인데는 불법도청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불법인데다 테이프 제공자의 의도에 휘말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가 어떤 의도로 이 테이프를 언론사에 제공했는지도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8000개에 달한다는 테이프 가운데 하필이면 국내 대표하는 재벌의 핵심인사와 유력 일간지 사주의 대화내용을 담은 녹음 테이프를 언론사에 제공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모종의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좀 더 고차원적으로 보자면, 이 사건은 불법도청된 대화 내용 가운데 범죄의 의심이 되는 내용이 있을 경우 도청 자료를 토대로 수사를 해 처벌할 수 있느냐는 문제와 더불어 이를 언론이 보도할 경우 법적인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가 개재돼 있다. 이래저래 이 사건은 관심의 초점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우리 사회의 가치 판단의 기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소재임에 틀림없다.    


얼마전 독일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이 쿠웨이트를 4 0으로 대파하고 6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이 경기에서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주영이 선제골을 뽑았죠.  김동진이 왼쪽 골대 부근에서 빠르게 올려준 공을 이동국과 함께 문전으로 쇄도하던 박주영이 발로 살짝 방향을 바꿔 첫 골을 넣었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누구라도 그렇게 공이 왔다면 쉽게 골을 넣을 수 있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느리게 재생한 득점장면을 보면서  박주영이 마치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사자와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의 양 옆에 쿠웨이트 수비수가 밀착수비를 하며 따라갔지만, 박주영은 마치 사자가 날카로운 앞발을 뻗어 먹잇감을 낚아채듯 공을 향해 발을 쭉 뻗어 골문 안으로 밀어넣었습니다.

 

이처럼 결정적인 찬스를 포착했을 때 정확한 판단력과 뛰어난 순발력으로 득점을 올리는 선수를 흔히 킬러(killer)라고 부르죠. Killer는 살인자라는 뜻도 있지만 속어로 경이적인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또 형용사로도 쓰이는데, 그 때는 치명적인 인상적인이라는 뜻입니다. 운동경기에서는 상대팀의 천적이거나 확실한 해결사라는 의미로 킬러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죠. 

 

킬러라는 단어는 이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사용됩니다. 마케팅에서는 특정 품목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대형 매장을 갖추고 저렴한 가격으로 제품을 공급해 손님들을 끌어들이는 곳을 카테고리 킬러(Category killer)라고 부릅니다. 하이마트나 하나로마트, 맘스맘 등이 대표적인 카테고리 킬러이죠.

 

킬러는 이외에도 특정 기술이나 서비스에서 소비자들을 만족시켜 수익의 원천 역할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데도 쓰입니다. 이른바 킬러 애플리케이션이나 킬러 컨텐츠가 바로 그것입니다. 뉴미디어나 IT분야에서 이런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한마디로 소비자들에게 먹히는, 돈이 되는 응용소프트웨어와 컨텐츠를 일컫는 말입니다.

 

컴퓨터를 예로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인터넷으로 필요한 정보를 서핑하고, 커뮤티케이션을 하고, 게임을 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문서작업을 하고, 디카로 찍은 사진을 편집하고, 문서나 파일을 저장하고, CD DVD를 재생하고 등등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중에서도 컴퓨터를 어디에 쓰기 위해 구입하는지 를 안다면, 그에 맞춰 컴퓨터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구성해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입니다. 90년대초를 되돌아보면 당시 컴퓨터학원에서는 워드프로세서와 스프레드시트를 주로 가르쳤습니다. 저도 당시 워드프로세서와 컴퓨터의 기본기능을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 PC를 사용해 주로 문서작성과 표 계산을 했기 때문이었죠. 그렇지만 인터넷이 보급된 이후 컴퓨터의 주 사용목적이 인터넷 접속 또는 게임으로 바뀌었고, 따라서 컴퓨터를 구입할 때 모뎀의 성능과 게임을 무리없이 띄울 수 있는 CPU와 메모리, 그래픽카드가 중요한 변수가 됐습니다. 이제는 PC의 성능 개선이 어느 정도 한계점에 도달하자 PC AV 중심기기로 만들겠다는 컨셉으로 윈텔(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인텔) 진영이 미디어센터 PC라는 것을 들고 나왔습니다. PC에서 음악 파일을 전송해 오디오로 듣고, 영상을 TV로 전송해 DVD나 동영상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당초 의도와 달리 얘기가 다른 방향으로 너무 나간 것 같네요. 궤도를 수정해서 제 직책(미디어연구팀장)과 관련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요즘 뉴미디어와 관련있는 사람들이 입만 열면 빠지지 않는 단어가 몇가지 있습니다. DMB, 와이브로(휴대인터넷), IP-TV, 유비쿼터스 등입니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이 동시다발적으로 밀어닥치고 있기 때문이죠. 새로운 통신방송 기술이 보급되면서 미디어 환경이 급속하게 모바일, 동영상 중심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입니다. 이미 위성 DMB 5월부터 상용서비스를 시작했고, 사업자 선정을 마친 지상파 DMB는 올 하반기에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할 예정입니다. 와이브로도 사업자가 정해진 상태에서 서비스 개시가 내년으로 예정되어 있으며, IP-TV는 성격 규정이라는 정책적인 문제가 남았지만 기술적으로 서비스에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기술이 한꺼번에 밀어닥치고 있어 과연 무엇이 소비자들을 사로잡을지 예측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다만 사업자나 연구소 등에서 예측한 수치상으로는 DMB가 가장 파워풀한 기술로 꼽히고 있습니다. 휴대폰과 하나로 합쳐진 작은 단말기를 통해 강력한 컨텐츠인 지상파 방송을 공짜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은 단말기 가격이 비싸고, 크기도 기존 휴대폰에 비해서는 좀 큰 것이 흠입니다. 또 당초 지상파 방송을 공짜(지상파의 경우, 위성DMB는 한 달에 13000원을 내야 함)로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시작했지만, 사업자들이 전파음영지역 해소를 위한 캡필러 설치등에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는 만큼 한달에 몇천원 정도의 비용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어 무료 서비스가 유지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TU미디어가 공개한 위성DMB 시험방송에서 나타난 프라임타임(점선부분), 그래프를 클릭하면 확대된 그림을 볼 수있음>

 

문제는 DMB나 와이브로, IP-TV 등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에서 과연 소비자들이 어떤 컨텐츠를 주로 찾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TV에서는 드라마가 넘버원이고, 코미디나 시트콤도 시청자들을 수상기 앞으로 불러 모으는 주요 컨텐츠라고 할 수 있죠. 물론 뉴스나 스포츠 중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컴퓨터는 인터넷이 가장 핵심적인 기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DMB나 와이브로는 모바일 환경에서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기존 TV와 컴퓨터와는 컨텐츠 이용에서도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TV는 거실에서 편안하게 앉아 보기 때문에 방송시간이 긴 프로그램도 소화할 수 있지만, 휴대폰으로 보는 TV 방송은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예측은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입니다. 현재 위성 DMB 상용서비스를 하고 있는 TU미디어 서영길 사장은 지난달 서울디지털포럼의 주제발표를 통해 당초에는 가입자가 DMB 서비스에 20분 이상 집중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가입자가 주로 지하철 등 이동구간에서 DMB 서비스를 이용할 것으로 예상한 것과 달리 대기시간 등 정지구간에서도 많이 이용하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프라임 타임은 출근시간, 점심시간, 퇴근시간, 자정 무렵 등 가입자가 자신의 시간을 낼 수 있는 구간으로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프라임타임이 하루 4번 나타난다는 얘깁니다. 그래프를 보면 아시겠지만, 지상파 방송에 비해서는 프라임타임과 비프라임타임간 높낮이 차이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습니다. 아직은 가입자가 많지 않은데 따른 현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본질적인 차이일 수도 있을 겁니다.

 

뉴미디어 사업자의 최대 고민은 가입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고, 이용도를 높일 수 있는 킬러 컨텐츠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휴대폰이 급속하게 확산되기 시작한 90년대 후반으로 되돌아가보면, 휴대폰으로 이용할 수 있는 컨텐츠와 기능이 다양했지만 킬러 컨텐츠가 벨소리와 통화연결음(컬러링)이었습니다. 애니콜이 16화음, 64화음 벨소리 휴대폰을 앞서 출시하면서 히트를 쳤죠. 하나에 몇백원 하는 벨소리와 컬러링 시장이 1년에 1000억원이 넘어갑니다. 사실 이 시장을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같습니다. 덕분에 컬러링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오사이오(700-5425)는 많은 돈을 벌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시장을 예측하는 매우 어렵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만일 그것을 미리 알 수 있다면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TU미디어의 시청자 참여프로그램 그래픽(위)과  포켓드라마의 한 장면>  


다양한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미래의 미디어 시장은 현재처럼 신문과 방송, 인터넷으로 분야를 나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비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위한 전방위적인 경쟁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것은 곧 무엇이 킬러 컨텐츠이고, 어떤 것이 킬러 애플리케이션인지를 예측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예측하기 위해서 사업자들은 가입자나 예비 가입자들을 상대로 시장조사를 하고, 시장의 변화를 세밀하게 관측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성 DMB 서비스를 하고 있는 TU미디어는 블루채널을 통해 다양한 컨텐츠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휴대성과 양방향성, 멀티미디어의 특성을 살린 킬러 컨텐츠를 발굴하려는 노력인 것이죠. 머지 않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프로그램이 또 하나의 유행이나 문화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만들거나 찾지 못한다면 DMB나 와이브로, 그 무엇도 과도한 투자에 비해 실속없는 서비스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킬러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거대한 미디어 게임이 지금 우리 눈 앞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