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1일은 기자들에게는 한여름의 대목이었다. 굵직한 뉴스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졌기 때문이다. 뉴스 거리가 쏟아져 기사 걱정은 없었지만, 어느 지면에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머리를 싸맺을 것이다. 우선 군부대 총기탈취-도주사건이 진행중인데다, 이른바 이상호 X파일이 조선일보의 보도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거기에다 언론에서 딸들의 반란으로 이름붙인 종중땅 관련소송에서 대법원이 40여년만에 판례를 뒤집고 하급심 판결을 파기함으로써 결혼한 여자도 종중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게 됐다. 관습법이 최고법원의 판결에 의해 변경된, 여성계로서는 반가운 뉴스가 아닐 수 없다. 경제쪽에서도 근래 보기드문 일이 벌어졌다. 총수 일가의 우애가 각별한 것으로 알려진 두산그룹에서 명예회장이 최근 총수로 취임한 박용성 회장의 비리의혹을 직접 폭로한 것이다. 해외에서도 큼직한 뉴스가 날아들었다. 영국 런던에서 지하철 폭발사건이 발생해 CNN을 비롯한 전 세계 언론이 긴급뉴스로 다뤘고, 중국이 마침내 위안화를 평가절상하면서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환율정책을 변경했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야말로 빅뉴스이다.

 

                            <미디어오늘에서 퍼온 X파일 그래픽>


 

필자가 사회부 기자 초년병 시절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89 7월로 기억되는데, 임수경씨가 북한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날 대한항공기가 리비아 트리폴리 공항에서 추락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날 울릉도 부근에서 헬기가 추락해 10여명이 숨졌지만, 워낙 큰 사건에 밀려서 크게 취급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많은 뉴스 가운데도 단발성이 있고, 앞으로 계속 진행되는 진행형 뉴스가 있다. 진행형 사건의 대표적인 것이 한동안 언론 관련 미디어에서 이상호 X파일로 표현했던 안기부의 불법도청 테이프 사건이다. 이 사건은 뉴스거리로서 언급되는 각종 요소를 두루 포함하고 있다. 우선 등장인물이 초호화급이다. 국내를 대표하는 대기업집단의 핵심인사와 유력 중앙일간지 사주가 주역이다. 테이프에는 이 대기업집단의 회장도 언급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거기에다 문제의 테이프를 만든 곳이 국내 최고 정보기관인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의 비밀도청팀이고, 테이프가 불법 도청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불법 도청한 테이프에 녹음된 내용이 97년 대선을 앞두고 대표 재벌과 대선 후보들간 대선자금과 관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구나 이 사건은 MBC가 문제의 테이프를 입수하고도 장시간 미적거리는 사이에 조선일보가 첫 보도를 낚아챈 것으로, 평소 불편한 관계인 양사간 경쟁도 뉴스 관전의 재미를 더하게 하는 요소다.

 

관전자로서는 이 사건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이고, 어떤 점이 관전포인트인지 짚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사건을 직접 취재하는 기자들로서는 피말리는 경쟁의 연속이고, 때로는 보도의 방향과 가치를 놓고 심사숙고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골치아픈 사건이지만.

 

이런 류의 사건이 터지면 으레 나오는 것이 진상규명 요구이다. 처벌 여부는 차치하고 진상부터 가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언론,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에서 터져나오기 마련이고, 네티즌들도 이에 가세하게 된다. 다행히 당사자의 하나인 국정원이 진상규명 조사에 나서겠다고 발표를 했기 때문에 불법도청에 대한 조사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사의 핵심주체는 역시 검찰이다.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검찰이 나서야 하지만, 복병이 있다. 바로 공소시효의 문제다.

 

<문제의 테이프에 등장하는 대기업집단측 변호인이 서울남부지원에 보도금지가처분신청을 낸 후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검찰 간부들이 사회적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늘상 검찰은 의혹을 해소하는 기관이 아니다 의혹만 갖고 수사에 들어갈 수는 없다 검찰은 불법행위자를 가려내 처벌하는 기관이다 등의 말로 시간을 끈다. 이렇게 전후좌우를 살피는 시간을 번 다음 광범위한 정보 수집을 통해 사건의 성격을 가늠하면서, 향후 수사에 대비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사건을 보면 불법도청이라는 불법행위의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에 검찰이 의혹만 갖고 수사하기는 곤란하다는 말로 버티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불법도청과 불법 정치자금 제공 모두 공소시효가 종료된 것으로 보이는 점이 검찰로서는 시간을 벌기위한 핑계거리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치권 일각에서(97년 대선의 유력후보 진영이었던 정당은 목소리를 높이고 어려울 것으로 예상됨)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사회적 여론이 수사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몰리게 되면 검찰도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 것이다. 공소시효 문제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불법도청 자체는 시효가 소멸됐다고 하더라도 비밀준수 의무가 있는 안기부 직원이 기밀(불법을 폭로한 것이 비밀누설에 해당하는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을 누설한 시점이 언제인지, 해외에 도피했을 경우 공소시효 진행의 정지 여부 등 법률적으로 따져봐야 할 점이 많다. 또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불법도청된 내용을 공개한 행위의 위법성 문제도 있다. 따라서 불법행위자의 처벌 가능여부는 수사를 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공소시효 도과를 이유로 수사를 미루기는 힘들지 않을까 추측된다.


다음은 수사 또는 진상규명 여론의 초점이 어디에 모아질까 하는 점이다. 불법 도청에만 국한할 것인지, 아니면 도청의 대상이었던 인물의 대화내용에 포함된 불법행위 의혹까지 확대할 것인지 하는 문제다. 재벌이나 유력 보수일간지에 호의적이지 않은 언론 매체와 시민단체, 정당은 불법도청이라는 수

단보다는 도청 대상의 대화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지만 불법도청과는 달리 녹음 테이프 안에 등장하는 97년 대선자금까지 수사를 확대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여러가지 논점을 안고 있다. 우선 불법적으로 도청한 테이프를 토대로 대화내용에 포함된 불법행위 의혹을 수사해 처벌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92년 대선 직전 부산 초원복집 사건이 있었지만 당시는 불법도청한 정주영 후보측 인물들만 처벌을 받았다. 눈치빠른 사람들은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외국의 비슷한 사건의 판례를 찾기 시작했을 것이다. 또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97년 대선 당시의 불법 정치자금을 파헤치는 것이 적절한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일부에선 뇌물죄의 경우 공소시효가 남았다는 주장을 펴지만, 외견상 뇌물죄를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02년 대선자금을 수사한 전례가 있긴 하지만 97년 대선자금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고, 2002년 대선 불법자금 수수로 처벌받은 사람들이 거의 다 풀려난 마당에 8년 전 대선자금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다분히 있다.

 

 

정치권과 언론이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룰지도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알다시피 국내를 대표하는 이 재벌의 파워는 막강하다. 이 대기업집단의 대표기업은 국제신인도가 대한민국보다 높을 정도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는 초일류기업이다. 더구나 이 대기업집단의 로비력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여서 OO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권 쪽에서는 막강한 후원자이고, 언론사 입장에서는 유력 광고주이다. 따라서 정치권과 언론이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지켜보면 과연 이 재벌의 로비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체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당사자도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했는지, 언론사를 상대로 한 소송을 불사하겠다며 무분별한 취재경쟁에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 언론사로서는 이 사안을 섣불리 다루기는 어렵다. 자칫하면 거액의 소송을 당할 수 있는데다 유력 광고주까지 잃는 아픔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부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이 재벌이 유력 광고주이기 때문에 기사 자체가 왜곡되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만인이 주시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언론사간 보도의 미묘한 차이도 빼놓을 수 없는 관전포인트이다. MBC가 테이프를 들고 만지작거리는 사이에 조선일보가 치고 나온 사건인데다, 유력 일간지 사주가 개입되어 있고, 방송사와 보수 언론사간 미묘한 알력이라는 함수가 내재되어 있어 각자 이 사건을 어떤 방향과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분석거리다. 불법도청에 초점을 맞출지, 아니면 대화내용에 들어있는 불법 대선자금 의혹에 포커스를 둘지에 따라 타격을 받는 쪽이 확연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아직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지만, 문제의 테이프를 언론사에 제공한 쪽의 숨은 의도도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일부 보도에 의하면 MBC가 테이프를 입수한 이후 보도를 놓고 망설인데는 불법도청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불법인데다 테이프 제공자의 의도에 휘말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가 어떤 의도로 이 테이프를 언론사에 제공했는지도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8000개에 달한다는 테이프 가운데 하필이면 국내 대표하는 재벌의 핵심인사와 유력 일간지 사주의 대화내용을 담은 녹음 테이프를 언론사에 제공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모종의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좀 더 고차원적으로 보자면, 이 사건은 불법도청된 대화 내용 가운데 범죄의 의심이 되는 내용이 있을 경우 도청 자료를 토대로 수사를 해 처벌할 수 있느냐는 문제와 더불어 이를 언론이 보도할 경우 법적인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가 개재돼 있다. 이래저래 이 사건은 관심의 초점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우리 사회의 가치 판단의 기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소재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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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우 | 2005/07/24 06:15 | DEL | REPLY

역시 정호원 선배다운 멋진 분석,해설,추론이군요. 저자와의 상의없이 우리 웹사이트 www.sundaytimes.co.nz에도 올려야 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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