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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아시아 예선 3차전 한국과의 경기를 앞두고 “앞으로 30년 동안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겠다”면서 한국을 극도로 자극했다가 2연패 후 “내 인생에 가장 굴욕적인 날”이라며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질렀던 일본 국가대표 야구팀 주장 스즈키 이치로(鈴本一郞·시애틀). ‘일본산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과 함께 미국 메이저리그를 주름잡는 일본의 야구 영웅인 그는 왜 그토록 죽기살기로 한국에 대드는가.
이치로는 1990년대 중반 한국을 방문했을 때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마늘 냄새가 난다”고 대답 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전에서 잇따라 패해 망신을 톡톡히 당한 이치로는 5일 한국과의 경기에서 2-3으로 역전패를 당한 뒤 한국 야구팬들에게 번듯한 이름 대신 ‘입치로’ ‘입치료’ ‘혀치로’ 등 굴욕적인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일부 네티즌은 이치로에게 ‘오럴 베이스볼의 창시자’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 야구의 또 한 명의 영웅 마쓰이 히데키(松井秀樹·양키스). 일본리그와 메이저리그에서 4년 동안 홈런 170개를 기록한 마쓰이는 “WBC보다 스프링캠프가 더 소중하다”며 이번 대회 불참을 선언, 일본 야구팬은 물론 일본 국민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WBC 홍보대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한 토미 라소다 WBC 홍보대사는 11일 “실망했다. 왜 조국을 위해 뛰려고 안 하는지 모르겠다. 일본이 이기면 온 나라가 행복해지는 것 아니냐”면서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2004 세계축구선수 연소득 순위에서 데이비드 베컴(맨체스터),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 리오 퍼디낸드, 알렉산드로 델 피에로에 이어 6위에 오른 나카타 히데토시(中田英壽)는 자타가 인정하는 일본 축구의 자존심. 20대 초반에 이탈리아 명문 세리에A리그에 진출해서 페루지아-AS로마-파르마를 거쳐 현재는 볼로냐 소속인 그는 한·일전 때면 어김없이 출장하지 않아 수많은 일본 국민으로부터 의구심을 받아왔다.
이번 WBC에 참가와 불참으로 일본에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이치로와 히데키, 그리고 나카타 등 3명의 일본 스포츠 영웅은 공교롭게도 공통점이 있다. 놀랍게도 이들은, 한민족의 피가 흐르는 재일교포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다. 서울에 머물고 있는 재일동포 재야사학자 김일형(金日亨) 현대일본연구소장의 증언이다.
김일형 소장은 지난해 여름께 기자에게 건넨 ‘친일파의 변질을 예고한다’는 소논문에서 “역도산(力道山)이 전성기 때는 자신이 한국 사람 출신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은폐했고, 403승을 올렸던 신화적 재일교포 빅 투수 김정일(金正一)에 관해서는 그를 망각 건너에 매몰해 버렸다”며 “현재 활약 중인 (야구계의) 이치로와 히데키, 그리고 축구의 나카타도 그들이 한국인 핏줄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도 언젠가는 한국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라고 기술했다. 김 소장은 당시 필자에게 문제의 논문을 전해주며 '적당할 때' 공개하라고 부탁했다. 기자는 지금이 바로 그 적당할 때라고 판단돼 마침내 공개한다.
그런데 이들 왜 굳이 자신이 재일한국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오버해서 한국을 혐오하는 발언을 일삼는 것일까.
기자의 단견으로는 일본인들의 정서와 재일교포의 울분, 그리고 한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를 40년 동안 지배했던 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을 무시한다. 한국인을 비하할 때 부르는 ‘조센징’이라는 말도, ‘조선의 하층민’이라는 뜻이다. 일본은 상층, 한국은 하층으로 분류해 제멋대로 규정한 용어다. 즉, 일본은 양반이고, 한국은 머슴 또는 천민으로 여긴 셈이다. 우리가 일본인을 ‘쪽발이’라고 비하해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최근 한 재일교포의 기고문에 의하면 일본 초·중등학교에서는 재일교포 2세나, 3세, 그리고 한국에서 태어나 이민 간 1.5세를 학교 교실에서 ‘관찰 대상’으로 선정해, ‘조선인은 어떻게 밥을 먹나’ '공부는 어떻게 하나' '숨은 어떻게 쉬나' 등을 파악하기 위해 마치 동물원 원숭이 바라보듯 하루종일 관찰을 한다고 밝혀 충격을 준 바 있다.
이런 갖은 멸시와 차별을 받아온 재일교포들 중 일부는 아예 일본에 귀화하거나 아니면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숨긴 채 일본인보다 더욱 철저히 일본 사람인 양 한다는 것이다.
이치로는 2001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 통산 타율이 무려 0.332나 된다. 2004년에는 262안타로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안타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대로 친다는 유일한 메이저리거다. 도루에서도 최고 선수다. 1루만 나가면 3루까진 그냥간다. 원래 투수 출신으로 수비도 일품인 건 물론이다. 외야에서 포수한테 직구 스트라이크 던지 듯 송구하는 괴력의 선수이기도 하다. 그가 수비나 송구에 실수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이유이다.
이날 일본과의 경기에서 2루타 결승타점을 날린 이종범이 “한국에서 태어나길 잘했다”는 말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재일교포는 단지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이외엔 우리와 똑같은 민족, 똑같은 사람인데 말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에서 태어난 이치로를 미워하지 말자. 일본에 귀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를 이해하고, 가능하다면 사랑하려고 노력해보자.
■장훈과 김정일은 누구
1. 장훈=일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도쿄의 프로 야구단인 도에이플라이어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첫 시즌인 1959년에 13개의 홈런,57 타점,타율 0.275를 기록하며 퍼시픽리그의 신인왕이 되었고, 이듬해에 올스타전에서 0.302 를 올려 최우수 선수에 뽑혔고, 1961년의 세 번째 시즌에서 타율 0.336으로 피시픽리그의 타격왕이 되었습니다.
장훈이 들어갔을 때 도에이 팀은 퍼시픽리그에서 꼴찌나 다름없엇습니다. 그러나 1961년에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오고 나서 이 팀은 다음해에 퍼시픽리그에서 우승하고, 일본 시리즈에 나가 한신 타이거스를 물리치고 일본 챔피언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 때에 도에이 팀의 4번 타자인 장훈은 타율 0.333홈런 31개 ,타점 99개를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처음으로 정규 시즌의 최우수 선수가 되었다.
정훈은 1975년의 시즌이 끝나 35세의 나이로 요미우리 자이어츠 팀으로 옮겼다.
자이언츠의 나가시마 감독이 꼴찌로 떨어진 팀을 구하려고 장훈을 데려간 것. 자이어츠팀은 결국 1976년 센트럴 리그에서 우승했다.1980년 40세에 장훈은 롯데 오리온스 팀으로 옮겨 그 해에 3000번째 안타를 쳤다.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1981년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1990년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전당에 이름이 올랐다.
일본에서 하리모토 이사오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장훈, 그는 선수생활 내내 일본으로의 귀화를 단념하고, 거리낌없이 한국인임을 내세우는 희대의 우리의 슈퍼스타다.
장훈은 23시즌동안 2752경기에 출전해서 9666타수 3085 안타, 1676 타점, 타율 0.319라는 눈부신 성적을 남겼다.
그동안 수위타자 7회, 최고 출루율 9회의 타이틀을 차지했고, 신인왕, 최우수 선수 1회, 베스트 나인 16회의 표창을 받았으며, 통산 최다안타 3085, 1이닝 최다 2루타 2, 퍼시픽리그 기록은 시즌 최고 타율 0.383, 통산 최다 고의 4구 223이다.
그가 터득한 광각타법(부채꼴 타법)은 투구의 코스를 거르지 않고, 당기고, 되받아치고, 밀어서 좌.중.우 어느쪽이던 투구코스 방향으로 타구를 날려 보낼 수 잇는 고난도 기술의 타법이다. 지금 일본의 선수 중에 장훈의 광각타법을 손색없이 이어받은 타자는 오릭스의 천재타자 이치로 뿐이다.
장훈은 1940년생으로 오사카의 나니와 상고를 졸업했다. 고교 재학 중에 야구부 내 폭력사건으로 근신처분 받은 탓에 고시엔 대회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투수 겸 4번타자로 장훈의 명성은 프로 스카우터의 주목의 대상이었다. 졸업 후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하여 18세의 나이에 5번타자로 발탁이 됐고 그해 125경기에 출전해 타율 0.275, 13 홈런, 57 타점으로 신인왕에 선정됐다.
1962년 도에이는 페넌트레이스에서 우승하고 일본시리즈에서 한신타이거즈를 4승2패로 물리치고 우승했다. 당시 일본 매스컴들은 장훈에게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지어 붙였다.
그는 도에이에 있을 동안 3할대의 타율을 유지하는 빼어난 타격 솜씨를 자랑했다. 1976년 자이언츠로 이적하여 프로 동기생으로서 외국 혈통 선수로서 사귀어 온 벗, 왕정치와 더불어서 팀 주포 역할을 맡아 우승에 공헌하면서 비로소 명문팀의 선수로서의 인기를 체험하게 된다.
1980년 한국계 출신 가네다 마사이치(김정일)가 감독으로 있는 롯데 오리온즈로 트레이드 된 그는 1981년 5월 가와사키 구장의 대 한큐 경기 4번째 타석에서 우월 홈런으로 일본프로 야구사상 최초로 3000 안타를 기록한 뒤 다음해 시즌까지 85안타를 기록해 통산 3085 안타라는 일본 최고 기록을 수립하고 23년에 걸친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기록 가운데 수위타자 7회와 통산최다 안타가 불멸이라 해도 무방한 값진 기록이다.
일본 프로야구 영웅 재일교포 장훈에게 정중히 인사하는 스즈키 이치로
![]() ◇2006년 3월 5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아시아 시리즈 한국-일본의 경기에 앞서 일본 대표 이치로가 일본 프로야구 영웅 재일교포 장훈을 찾아 정중히 인사를 하고 있다. |
2. 김정일= 일본으로 귀화해서 '가네다(金田正一)'라는 성을 썼던 그는 재일교포 2세로 본 이름은 김정일(金正一)이다. 그는 일본 프로야구사상 최고의 좌투수로 평가받고 있는 대스타로, 앞으로 절대로 경신되지 않을 대기록을 여럿 보유하고 있는 '기록의 사나이'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수많은 기록 중에서도 통산 400승, 통산 탈삼진 4,490, 14년 연속 20승의 일본 최고기록이 가장 돋보이는 기념비적 기록들이다. 이 세 가지 일본기록 중에서 통산 4,490 탈삼진과 400승은 세계 프로야구 통산기록 2위와 3위에 올라 있는 값진 것으로, 탈삼진은 로란 라이언에 이어 2위, 승수는 전설적인 대투수 사이 영과 월터 존슨에 이어 3위에 랭크돼 있다. 일본 야구장의 크기를 문제삼아 오-의 홈런 세계기록을 한사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 메이저리그도 가네다의 탈삼진 기록은 군말 없이 공인하여 기념공과 글러브를 쿠퍼스타운의 명예전당에 전시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한편 통산 최다승 일본기록 2위가, 한때 한국계라는 풍문이 있었던 요네다 데쓰야의 350승인 것을 보더라도 가네다가 거둔 400승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게 된다. 가네다는 1933년생으로 아이치현 교에이 상업고교 1학년 때 고시엔 대회에서 구원투수로 크게 활약하여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다음 해 지구예선에서 탈락하자 2학년 수료 후에 학교를 중퇴하고 1950년 초 프로야구 고쿠데쓰 스왈로즈에 입단했다. 양 리그를 통틀어 최연소선수였으나 3∼4년 후에는 프로야구 최장신 선수로 자라게 된다.
입단 첫해 가을 대 다이요 웨일즈 전에 선발 등판한 그는 뜻밖에도 완투승을 거두어 약관 17세의 소년투수로 프로 첫 승리를 따냈다. 이는 일본 프로야구의 입지전적 인물로 꼽히고 있는 연습생 출신의 전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 고 니시사와의 만 16세에 이어 두 번째 최연소 승리투수 기록이다. 400승을 향한 첫발을 내디딘 그는 시즌 후반에만 8승을 올렸다. 수뇌부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당당하게 투수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입단 2년째인 1951년 시즌에는 신인이나 진배없는 어린 투수가 강호 한신 타이거스를 노히트노런으로 제압하여 최연소 노히트노런 투수라는 귀중한 기록을 세우면서 22승을 거두었다. 연속 14시즌 20승의 테이프를 끊은 셈이다.
일찍부터 대기(大器)의 편린을 내비치던 그는 시즌을 거듭할수록 기량도 일취월장했다. 1957년 8월 대 주니치 전에서 드디어 투수 최고영예인 퍼펙트경기를 달성했다. 프로야구사상 세 번째이고 최연소로 기록한 완전경기였다.
그러나 이 경기 9회 말 노아웃에서 주니치 대(代)타자의 하프스윙을 둘러싸고 야구사상 최악의 트러블이 일어났다. 퍼펙트 직전의 궁지에 몰린 주니치가 주심의 하프스윙에 의한 삼진판정에 불복하여 격렬한 항의를 거듭하면서 경기속행을 거부하자 과격하기로 이름난 나고야 팬들이 극도로 흥분했다. 대군중이 그라운드로 난입해 들어올 것 같은 공포 분위기로 바뀌자 결국 주니치가 승복해서 경기를 속행했으나 후속 타자의 연속삼진으로 퍼펙트경기의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사태는 경기 종료 후에 벌어졌다. 관객들이 일제히 뛰어들어와서 미처 구장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라운드에 고립돼 있는 심판을 무차별적으로 집단 폭행했다. 물론 주심이 가장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관중에 의한 불상사로는 최악의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투수다. 186cm의 장신인데도 근육이 그럴 수 없이 유연하고, 무릎과 허리는 용수철처럼 탄력이 있으며 팔이 유난히 길었다. 그 긴 왼팔에서 뿜어내는 묵직한 강속구와 칼날처럼 예리한 커브가 주무기였다. 경험을 쌓아가면서 투구 테크닉까지 몸에 익힌 가네다의 위력적 투구 앞에 내로라 하는 각팀 주력타자들도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가히 공전절후의 기록들과 공식타이틀 및 수상경력을 살펴보자.
우선 타이틀은 최다승리 3회, 최우수방어율 3회, 최다탈삼진 10회이고, 표창은 사와무라상 3회, 베스트 나인 3회, 일본 기록은 통산 최다승리 400, 최다 탈삼진 4,490, 최다 시즌 20승 이상 14, 최다 완투 365, 최다 투구횟수 5526회 2/3, 연속이닝 무실점 64회 1/3, 최다 탈삼진 10회, 통산 최다패전 298, 통산 최다여4구 1,808이고 센트럴리그 기록은 최우수 방어율 3회, 최다 승리 3회, 통산 최다등판 944, 시즌 최다완투 34, 통산 최다 무실점 승리 82, 경기 최다탈삼진 16, 통산 최다 피안타 4,120, 통산 최다피본루타 379, 통산 최다실점 1,705, 통산 최다 자책점 1,434, 통산 최다보크 11, 시즌 최다여4구 197이다.
희대의 대투수로서 피땀이 서린 고투 끝에 이룩한 찬란한 기록이 있는가 하면, 워낙 많은 경기에 나가다 보니 명예스럽지 못한 워스트 기록도 적지 않아서 기록을 살펴보는 데도 실로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여기 열거한 기록 중에서 통산보크 11을 제외하고는 경신될 공산이 전무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 기록을 깰 만한 역량을 가진 투수가 없기도 하거니와 지금은 에이스 투수 한 사람의 과다한 등판을 요구하지 않고, 투수의 역할을 분담해서 전황에 따라 제한적으로 등판시키는 시대이므로 언감생심 누구도 도전을 시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통산 400승 및 4,490 탈삼진은 말할 나위 없이 위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값진 기록이 14년 연속 20승 부문이다. 그는 입단 2년 만인 1951년의 22승을 시작으로, 14년간 내리 20승 이상씩을 올렸다. 투수가 아무리 몇 경기씩 연투를 예사로 하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단 몇 시즌도 아닌 14년 동안 내리 20승이라는 벅찬 기록을 중단 없이 유지한 경이로운 업적은 차라리 기적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어느 해인가 감독 배려에 의해서 정상이 아닌 구원등판으로 선발투수 몫이 돼야 할 승리를 빼앗다시피 해서 20승을 채워 빈축을 산 예가 있지만, 기록이 생명인 프로세계에서는 그런 사례가 간혹 있어 온 만큼 크게 흠 잡을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그는 투수이면서도 타격 부문 비공식기록 하나를 가지고 있다. 그는 20년 동안에 38개의 홈런을 침으로써 양 리그 통틀어 투수 중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쳤다.
가네다가 소속된 고쿠데쓰는 매 시즌 단골 하위의 약체팀이었다. 간판 상품이라야 가네다와 최강 자이언츠와의 대결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무적을 자랑하던 전성기의 거인군 타선이 가네다만 만나면 맥을 추지 못하고 승수를 늘리는 제물이 돼 주었다.
가네다는 고쿠데쓰 팀의 명운을 짊어지고 있는 에이스답게 자존심이 유달리 강했고,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감독 의도와 관계없이 선발이든 구원이든 던지고 싶으면 던졌고, 내려오고 싶으면 내려왔다. 평소 연습은 물론 스프링 캠프에서도 자기가 짠 스케줄대로 독자연습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반찬은 자기가 조달해서 맘에 맞는 동료와 함께 따로 떨어져서 먹기도 했다. 그의 행동거지는 안하무인으로 비춰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가네다 덴노(金田 天皇)'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1958년 희대의 거물신인 나가시마가 데뷔할 때의 유명한 에피소드는 40년이 흘러간 지금도 일본 프로야구계의 이야깃거리로 돼 있다. 그해 스프링 캠프의 연습경기와 시범경기(이른바 오픈전)에서 자이언츠에 입단한 골든루키 나가시마는 양 리그 각팀 주전급 투수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 큰 파문을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그해 자이언츠의 개막경기 상대가 고쿠데쓰였는데 흥분한 언론들이 '가네다도 나가시마에게는 별 수 없을 것이다'라는 투로 가네다의 자존심을 긁었다. 당대 최고투수를 자부하고 있던 그는 결연하게 선언했다. '그런 애숭이한테 당하면 가네다 이름이 운다. 전 타석 삼진으로 때려잡아 프로의 매운맛을 보여 주겠다.'
드디어 전국 야구팬의 뜨거운 관심 속에 대망의 역사적 대결이 벌어졌다. 결과는 가네다의 예언대로였다. 나가시마는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스피드와 컨트롤 그리고 타이밍을 전혀 맞출 수 없는 절묘한 피칭에 4타석 4연속삼진의 참담한 패배를 맛봐야 했다. 4차례 타석에서 나가시마의 배트를 스친 투구는 파울볼 3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가네다는 1965년 오랫동안 봉으로 삼아 왔던 거인군으로 이적해서 일본시리즈 우승의 환희도 맛보고 시리즈 9연속 우승에도 나름대로 공헌을 하였다.
가네다는 일본으로 귀화한 데 따른 뼈저린 소외감을 느낀 일이 있다. 1962년 가을 고쿠데쓰가 시범경기를 위해서 장훈 선수의 도에이 팀과 함께 서울에 원정 왔을 때의 일이다. '관객들이 장훈 선수는 대단한 박수갈채로 환영을 해주면서도 비록 귀화는 했을지언정 어엿한 한국계인 자신은 일본인 선수와 똑같이 대접해 줘서 섭섭한 느낌을 받았다'는 심경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가네다는 1970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 사이 20시즌 동안 944경기에 등판해서 5,526회 2/3 투구에 400승 298패, 승률 0.573, 피안타 4,120, 피홈런 379, 방어율 2.34의 통산성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1974년 롯데 오리온즈 감독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이어 일본시리즈에서는 주니치를 격파하여 한 차례 일본선수권을 획득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여러 해 동안 불펜에서 자신의 연습 투구를 받아 주다가 왼손 엄지손가락 마비 후유증을 얻은 고교동창생 포수가 고향에서 주유소를 차릴 때 적지 않은 자금을 쾌척해서 개업을 도와준 미담도 지니고 있다. 그는 야구해설과 잡지사 대담프로 사회를 맡아 능숙한 화술과 송곳 같은 직설로 현역시절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 때도 있었으나 요즘은 어쩐지 활동이 뜸하다. 가네다도 1988년 명예전당에 헌액이 됐다. 참조:웅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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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교수, 이치로 타격폼 정밀분석 “간결한 스윙 어떤 공도 공략 가능”::) 스즈키 이치로의 메이저리그 한시즌 최다안타 생산 비법은 ‘흔들림이 적은 타격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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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케모토 교수는 우선 오릭스 시절부터 이치로의 타격폼을 비디오로 촬영해 컴퓨터에 입력한 뒤 타격 포인트의 이동을 정밀분석한 결과, ‘흔들림의 감소’에 이치로 타법의 비밀이 숨어있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즉 이치로가 지난해에 비해 중심축의 흔들림이 적은 타법으로 변신했다”는 게 가케모토 교수의 결론이다.
이로 인해 이치로는 타격시 머리의 움직임이 작아졌고, 테이크 백 동작을 통해서 얻은 파워를 상체 뒷부분으로 모아서 이동시킬 수 있게 됐다는 것.
가케모토 교수에 따르면 머리 움직임이 줄어들면서 이치로는 타석에서 0.05초 이상 공을 더 볼 수 있게 됐다. 시속 150㎞의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 포수 미트에 들어가기까지 약 0.4초가 걸린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치로가 얻는 0.05초의 여유는 크다.
또 작년까지 스윙하면서 생기는 눈의 상하 편차가 7㎝였는데 올해는 2㎝로 거의 움직임이 없어졌다. 배리 본즈(17㎝)나 마쓰이 히데키(20㎝)와 같은 장거리 타자의 경우 공 아랫부분을 치기 때문에 타격시 눈의 위치가 많이 내려가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에 따라 시속 157km 이상의 강속구가 아니라면 이치로의 타격 메커니즘으로 대응 가능하다는 게 가케모토 교수의 분석이다.
가케모토 교수는 또 지난해 이치로의 타격시 어깨 각도가 125도였는데 올 시즌에는 110도로 작아졌다고 분석했다. 어깨 각이 좁아지면서 몸쪽 코스에 대한 적응력이 높아졌다. 이 때문에 이치로는 일본에서 뛸 때의 ‘시계추 타법’ 대신 보다 간결한 타법과 스윙으로 변신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는 일본의 가혹한 경제수탈로 생활의 터전을 박탈당한 한국인이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 이후에는 일제의 징병(徵兵)과 징용정책(徵用政策)에 의해 다수의 한국인이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재일교포에 대한 민족탄압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1923년 9월에 있었던 간토(關東) 대지진 때에 이성을 상실한 일본인에 의해 6000여명의 한국인이 무참히 학살된 사건을 들 수 있다.
8 ·15광복 당시 200만 명에 달했던 재일한국인은 일본의 패전과 함께 140여만 명이 본국으로 귀환하고 나머지 60여만 명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계속 잔류하게 됨으로써 이들이 현재의 재일교포를 이루게 되었다.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하여 한국·일본간에 체결한 협약.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체결되어 다음해 1월 17일부터 발효되었다. 전문과 6개조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강제 이주되어 생활하던 한국인은 8·15와 함께 많은 수가 귀국하였으나, 여러 가지 제약으로 약 60만 명 가량이 일본에 남게 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일본은 ‘외국인 등록법’과 ‘출입국관리령’을 시행, 한국인의 인권을 침해하였다. 이후 7차례의 한일회담이 열리면서 마침내 양국 정부는 이 협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주요 내용은 한국인의 영주권 문제, 내란죄 등 불법행위 이외의 사유로 인한 강제퇴거 문제, 본국으로 귀환할 때 재산의 처리문제 등이었다. 협약 체결로 영주권을 신청한 사람은 신청마감일인 1971년 1월 16일 35만 2000명이었다. 재산의 경우에는 귀국시 1만달러까지 소유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재일한국인의 일본 이주가 전적으로 당사자들의 의견이 무시된 채 강제로 이루어졌음이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오히려 뻔뻔하게도 동 협약을 무시하고 재일한국인에 대하여 차별대우를 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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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새로운 정보 있으면 기자님 블로그에 써주시던가 이 페이지 댓글에 써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이만...
그의 기록 년봉 어쩌고 저쩌고 하는 모든기록이 무참히 깨질때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구려 유민이 자기네는 고구려 유민이 아니고 일본인이다 라고 하고 침공한 것이 임진왜란이였다 .
그 당시에는 이기는 것 같았지만 아
홈런도 많이 때렸고 왕정치와 비교되는 일본 야구 역사에 길이 빛난는 한국인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