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평양모습(유튜브) - 세계일보 블로그

최근 평양에서 군사퍼레이드를 취재한 미 CNN 앵커의 취재기이다. 김정은을 중심으로 한 후계구도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리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란 어떤 책인가?

 이 책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는 청 건륭제가 1777년(건륭 42년)에 내각에 지시하여 건주(建州)의 연혁, 만주의 시기(始基: 근원) 및 고금의 지명의 같고 다름에 대하여 상세하게 조사해서 책으로 만들어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당시 문무를 고루 갖춘 고위 관원들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학사(大學士) 아계(阿桂)·우민중(于敏中) 등이 칙명을 받들어 그 책의 편집 장소, 그 작업에 필요한 인원의 구성, 소요 예산의 집행 방법, 책에 담을 체제와 내용 등에 대한 범례(凡例)를 건륭제에게 보고하여 책의 이름은 흠정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로 하라는 등 최종 제가를 받아 43명의 학자가 이 책의 편찬에 나섰다. 이 책은  그 이듬해에 완성,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건륭황제의 상유(上諭)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책인 만큼 그 내용 하나하나에 대하여 초고가 완성되는 대로 미리 올려 황제께서 직접 읽어 보시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의 주도 아래에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에 책 이름에는 황제가 직접 썼다는 뜻인 ‘흠정(欽定)’이란 글자가 들어간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라 한 것이다.

 이 책은 부족(部族)·강역(疆域)·산천(山川)·국속(國俗) 등 4개 부문으로 나누어 있는데 각 부문마다 맨 첫머리에 청조(淸朝)를 기술하였고, 그 다음에는 시대 순으로 고대부터 청나라 이전까지를 다시 배치하였다.

 첫째로 부족(部族)에 관하여는, 권1부터 권7까지, 위로 거슬러 올라가 숙신·부여(夫餘)·읍루·삼한(三韓)·물길(勿吉)·백제·신라·말갈·발해·완안(完顔)·건주(建州) 등 여러 부와 이웃에 있던 색륜(索倫)·비야객(飛野喀) 등의 흥망성쇠에 대하여 사적을 조사하여 이들 사이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을 고증하였다.

 둘째로 강역(疆域)에 관하여 권8에서 권13까지 숙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원대(元代)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책에 기록된 여러 부족의 도시와 촌락에 대하여 그 방위에 근거해서 당시의 지리 형세를 검증하고, 조목을 나누어 따지고 분석을 하고, 동시에 요나라와 금나라의 궁실의 배치 관계와 고적들을 기록하고, 명위소성참고(明衛所城站考)를 덧붙였다.

셋째로 산천(山川)에 관하여는, 권14권부터 15권까지, 거기에 있는 명천·승지(名川勝地)에 대하여 각종 지지(地志)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 이제 것과 옛 것을 호증(互證)하여 달라진 것을 분석하여 잘못된 것은 고치고, 고증할 수 없는 것은 의문으로 남겨 두었다.

 넷째로 국속(國俗)에 관하여는, 권16부터 권20까지, 만족(滿族) 및 그 선대의 습속·제사·물산 등에 대하여 조목을 나누어 열거함과 동시에 기사(騎射)의 기원과 음식의 특징 등 분야에 대하여 널리 그 유례나 증거를 인용하여 논증하였고 또한 발해의 문헌(文獻)·금원(金源: 금나라)의 관제 등에 대하여 여기에서도 덧붙였다.

이 책의 수권(首卷)에는 건륭황제가 수찬할 것을 명한 상유(上諭), 이에 근거해 편찬자들이 입안한 범례(凡例) 7조가 있다.
이 책의 사료는 정사(正史)와 그 밖에 50여 종의 전적 중에서 관계있는 자료를 선택하여 부문별로 나누어 종류별로 배열함과 동시에 상세한 고증을 하였다.

이 책은 청조(淸朝) 통치자들이 그 선대의 역사가 아득히 멀고 오래되었음을 자랑하고, 자기 부족에는 수많은 발상(發祥)의 역사가 있었던 것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청조 전기(前期)의 역사에 대하여 허식과 숨김이 있고, 여진(女眞)의 각부의 명왕조에 대한 예속관계에 대하여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고, 특히 명조의 통치하에 있었던 건주삼위(建州三衛)의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으며, 고증에 있어도 착오와 부당한 곳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책 속에는 만주와 한반도에 관련된 모든 문헌자료들이 수집되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기에 여전히 동북사지(東北史志)와 동북아시아 제 민족의 역동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고조선 계통인 부여(夫餘)와 이를 이은 삼국시대 이전의 삼한(三韓) 및 삼국시대의 고구려를 제외한 백제·신라에 대한 언급,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발해의 역사 등에 대한 기술 부분은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것이다.


2. 이 책은 어떤 활용가치가 있는가?

일찍이 이 책의 점교본을 쓴 손문량(孫文亮) 교수는 이 책의 편찬에 동원된 자료의 방대함이나 체제의 치밀성, 고증의 정밀성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의 정확성 면에서 오히려 학술적 가치에 손해를 끼친 바가 적지 않다고 지적을 한 바 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그 황당무계함을 통박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자료를 인용하는 사람이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잘 되었다고 칭찬하고 어떤 사람은 잘 못되었다고 헐뜯는 등 평가가 서로 엇갈리고 있다.
 이는 이 책의 편자들이 어떤 사료를 취사·선택함에 있어서 그 사관(史官)의 철학과 가치관이 은연중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 책의 제작 목적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자료를 이용하면서 범할 수 있는 실수를 미리 막을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은 건륭황제의 특명으로 청조(淸朝)의 봉건통치의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만든 관찬사서이다. 이런 목적에 부합하려다 보니 어떤 사료는 인용된 자료의 원문이 바뀌어 아예 그 근거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엄격한 분류와 중점을 보다 명확하게 하고 문장의 길이를 절약하기 위한 목적이라고는 하나, 원문 가운데서 일부를 발췌하여 인용한다거나, 문장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이용한다거나 심한 경우에는 기존의 문장에 이어서 고쳐 써버리는 등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고 한다. 또 이런 범위를 넘어서 어떤 인명·지명 등에 대하여 직접 원문을 아예 고쳐 버려 원문과 대조할 경우 그 면모가 전혀 달라지는 경우까지도 있다고 한다.

한편 이 책은 청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쓴 소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들의 조상의 내력을 유구한 역사로 포장할 수 있고 자기 나라의 강성함을 은연중 내세울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정통이라 일컫는 다른 중국의 사서에서도 마찬가지이기에 우리는 특별히 만주원류고 만을 집어 탓할 수만은 없다.

 홍이섭 선생은 사회 구조적 발전에 있어 만주를 기반으로 했던 한국민족사(韓國民族史)와의 관련으로 만주원류고는 이미 재론되어야 하는데 이제껏 학적 논구가 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한국사(韓國史)를 재인식하는 출발점의 한 문제가 만주원류고의 재고일 것인데 자칫 이러한 문헌을 방치하면 학적으로 문제가 되고 역사적인 인식에 있어 난제로 걸려들 사람은 한국 민족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우려를 표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 사학계 특히 강단사학자들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당하고 겨우 단재 신채호 선생, 담원 정인보 선생, 안호상 박사 등 극소수의 사람들만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로 이 책을 이용하였을 뿐이다. 이에 반하여 북한의 학자들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대만족주의(大滿族主義) 사상의 산물이라고 보고, 때로는 가차 없이 비판하면서도 이를 가감 없이 인용하고 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가치는 이 책에 들어 있는 수많은 안어(按語)에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는 우리 고조선을 비롯하여 위에서 언급한 숙신·부여·삼한·말갈·삼국(고구려 제외)·여진 등과 관련하여 그 연혁은 물론 지리적 위치 등 수많은 고증 자료가 무수히 실려 있으며, 관명·지명 등에 대하여는 만주어·몽골말과 관련 여부를 고증하는 등 언어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우리 국사 분야만 보더라도 원래 고조선(古朝鮮)이나 삼한(三韓)이 원래 만주(滿洲)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고, 현재 만주의 길림(吉林)이 신라의 계림(鷄林)이었음을 지리나 언어와 연관시켜 밝히고 있으며, 특히 백제의 강역에 대하여 그 전성기에는 중국 동부연안으로부터 요서·요동을 거쳐 황해·충청·전라도까지라고 하는 등 현재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상식과는 전혀 다른 기록이 있어 아주 흥미롭고 기존 사학계의 정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도 있어 우리나라 역사 특히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는 가치 있는 사서라고 생각된다.


3. 우리 삶의 원류: 만주원류고(파워북, 2008년 발행본 인용)

만주는 우리에게 특별하다. 고조선·고구려·발해가 활동했던 곳이었고, 청나라 말기 우리 민중들이 피땀 흘려 개척한 간도가 있는 곳이고,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 투쟁의 본거지였던 땅이기 때문이다. 우리 고대의 역사와 근대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만주는 우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만주 남부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백두대간이란 하나의 이동공간으로 묶여 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T자 모양으로 형성된 백두대간은 북쪽의 장백산맥이 북동쪽으로 연해주까지, 남서쪽으로 요동반도까지 이어진 긴 고원지대을 형성하고 있다(北백두대간). 백두산 남쪽으로는 개마고원에 이어 태백산맥, 소백산맥이 연결되어 한반도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다(南백두대간).

첫째 흐름, 백두대간 생활권

왜 길림성의 북간도가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 이주민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을까?
왜 여진의 청나라는 신라의 후예임을 자처했을까? 후금의 시조 누루하치의 성 ‘애신각라(愛新覺羅)’는 정말 新羅를 사랑(愛)하고 기억(覺)하자는 뜻인가?
왜 요하(遙河)는 일명 구려하(句驪河), 거류하(巨流河)라 불린다고 사서에 기록되었을까?
왜 갑자기 (통일)신라의 세력이 만주 길림까지 미쳤다는 기사가 나타났을까?
왜 고구려가 400년에 신라로 정병 5만을 파병했을까? 고구려는 군사작전 후 신라를 병합하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은 동부여도 점령한다(410). 그러나 494년에야 부여를 복속시켰다.
어떻게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 최리가 멀리 떨어진 옥저에서 만났을까?

둘째 흐름, 황해경제권

왜 20세기 초, 요동반도란 이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봉천회전을 벌렸을까?
왜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상해로부터 명나라의 수군이 조선에 파견되었을까?
왜 14세기에 왜구가 한반도 서남 해안과 중국 동해안에 빈번히 출몰했을까?
왜 9세기에 장보고가 해상왕으로 번쩍 등장했을까? 어떻게 당의 통치기에 산동성, 절강성, 복건성 등지에 신라방이 설치될 수 있었을까?
왜 663년 백제 부흥전쟁에 왜는 1,000여 척의 함선과 3만 7천의 군사를 백제로 파견했을까?
왜 4~5세기에 東西백제가 있었고 백제가 요서, 산동, 월의 절강성을 경략했다는 기사가, 그리고 백제가 부여를 침략했다는 기사가 사서에 불쑥 튀어나올까?
왜 요서/요동으로 생각되는 지역에 만번한·진번조선·진한·낙랑·대방 등이 사서에 등장할까?
왜 치우천황의 사당이 산동반도에서 발견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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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가지 흐름은 ‘자연환경이 조성한 생태계적 조건’과 ‘인간이 조성한 분업경제적 환경’에 우리의 선조가 대응한 행동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행동에는 방향성이 있다. 방향이 적합하고 구성원들의 행동이 집약되면, 상대적으로 작은 집단이라 하더라도 경제 생태계 전체를 리드해 나갈 수 있다.
한반도의 생태계적 조건은 한반도 중심을 관통하는 동경 127도를 중심축으로 하고 남북을 거꾸로 하여 북위 25도에서 55도 사이의 동북아시아 지형도를 바라보면 쉽게 간파할 수 있다. 한반도는 신천지를 찾아, 새로운 삶을 찾아 중국 대륙으로부터, 만주로부터 이동해 왔던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 갔던 장소이다. 또한 한반도로 유입되는 이웃 나라 사람들(기자집단, 위만집단, 낙랑의 한족, 몽골, 여진)이 자연스럽게 한민족으로 동화되어 생활권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경제권을 개척해 나간 장소이다.


백두대간 문화의 원류: 조선과 삼한 <‘칸(Khan)’들이 통치했던 세 나라>

만주원류고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한반도 남쪽의 지역 명으로 보지 않고 발해만 주위에 위치한 리더(韓; 汗; Khan)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사연구초’에서 삼조선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여기지 않고 말조선, 발조선, 신조선으로 상정했다. 마리Khan, 바리Khan, 쇠블Khan이 통치하던 마리조선, 바리조선, 쇠블조선인 것이다. 조선은 숙신/주신과 동음어로서 바이칼호에서 신선한 아침의 장소를 찾아 만주와 산동반도 이남으로까지 이동해 왔던 청동기 북방유목민을 일컫는 말로, 세 Khan의 조선나라는 상주(商周)교체기와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의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연(燕)과 한(漢)의 군사적 공격(B.C.3세기와 B.C.108)에 순차적으로 만주와 백두대간 각지로 이동했는데, 특히 한반도 남부에 마한, 진한, 변한으로 정착한 세력의 원류로 해석되고 있다.
‘바리’란 유목사회의 제사장(무당)을 일컫는 말로 불(火)과 밝음(明)에서 유래했다. 중앙아시아 발하슈호에서 시작하여 바이칼호, 발해로 이어지는 긴 여정에 족적을 남기며 부리, 부여, 변한이란 이름으로 사서에 등장한다.
‘마리’란 부족의 정치적 우두머리로 말(馬)과 머리(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라 지증왕 대까지 신라는 마립간을 임금의 호칭으로 사용하는데 마리와 칸의 합성어로 이해된다. 쇠블(혹은 쇠라)은 강력한 힘의 소유자이자 군사적 리더로, 한자로부터 금(金)·태(太)·각(角)을 의미로 차용하고, 발음으로 신(新)·진(辰, 震, 眞) 자를 차용한다. 辰은 辰國, 辰韓, 大辰國(발해)과 같이 한국 고대국가 이름으로 계속 등장한다.

황해경제권의 원류: 낙랑 <한민족으로 동화된 요서/요동/평양권의 무역 매개자>

평양이라 추정되는 왕험성의 위치,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시대의 한(漢)대 유물,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설화에서 보이는 1세기 고구려 대무신왕 때의 낙랑 정벌, 위(魏) 관구검이 244년 고구려 침공 전후 거쳐 간 낙랑로와 당시 고구려가 임시로 수도를 천도한 평양,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한 낙랑 정벌, 612년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루트 중 하나였던 낙랑로…
만주원류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담긴 위와 같은 기사들은 한 무제가 B.C.108년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평양에 설치했다는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만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기사들을 담고 있다. 낙랑은 곧, 평양이 아니다.

중국이 정치적으로 몹시 불안했던 기원 전후기 그리고 요동의 공손 씨가 독자 세력화되는 삼국시대에 평양의 낙랑군은 급속히 중국과 이격되고 자치지역화되면서, 요서와 요동을 잇는 독자적 경제권역을 형성했다. 특히 평양은 혼란기의 중국대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번창했고, 한족은 자연스럽게 한민족과 융화되면서 발해만과 한반도 남부의 백제 그리고 가야를 연결하는 국제무역의 중개 역할을 했다. 무역로를 따라 문화도 함께 이전되고, 요동과 요서에 낙랑이란 이름도 이식되면서 고유명사로 그 지역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낙랑공주의 아버지 낙랑태수 최리는 1세기 전에 한 무제와 함께 한반도로 건너온 한족(漢族)의 후예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한민족으로 동화된 평양지역의 수장이었다. 낙랑권역에서 수행된 국제무역은 4세기부터 점차 백제로 이관된다.

백두대간 생활권: 고구려와 신라 <신라는 고구려의 남쪽 분국>

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될 때 강원도 산간의 목재가 사용됐었다.
태백산맥에서 벌채된 목재는 정선 아우라지에서 남한강 물길을 따라 충주와 여주를 통과하여 마포로 실려 왔다. 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집안에서 신의주를 거쳐 황해로 나가는 압록강 뱃길은, 거리상 충주에서 마포까지 가는 뱃길과 비교될 수 있다.
집안에서 함흥까지는 황초령를 분수령으로 북으로 장전강, 남으로 성천강을 통해 이어져 있다. 장전강 중류 부근에서 육로로 아득령을 넘으면 서울서 평택 정도까지의 거리로 집안과 연결된다. 낭림산맥을 넘는 해발 1479m의 아득령이 그렇게 험할까? 아득령 전후는 같은 개마고원 일대에 있기에 실제 넘어가는 높이는 대관령의 832m보다 낮을 것이라 생각된다.

 길림에서 경주까지는 ‘신라로’라는 이름의 길로 연결되어 있다. 길림에서 연길로, 연길에서 회령을 거쳐 동해안 청진으로 통하는 길은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서 서희 일행이 북간도로 이주할 때 이용했던 길이었고 길상이가 사업을 위해 왕래했던 길이었다. 청진에서 함흥을 경유해 신라까지 가는 길은 쉬운 길이다. 해안을 타고 달리면 된다.

南백두대간의 개마고원은 숲이 울창하다 하여 만주어로 Waji(숲)라 불렀다. 한자로 표기하여 옥저(沃沮)이다. 1세기 초라 추측되지만 고구려의 호동왕자가 낙랑의 최리와 만난 옥저(함흥)와 고구려(집안) 사이의 노정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으리라 짐작된다.

3세기 이후부터 중국의 사서에 등장하는 고구려는 5세기 들어 남으로는 신라를, 서로는 후연을, 북으로는 부여를 그리고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내몽고지역까지 진출하여 대고구려 시대를 연다. 반면, 신라라는 이름은 5세기 되어서야 비로소 사서에 나타났고, 502년 지증마립간이 지증왕으로 임금 칭호를 바꾸면서 공식 국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라는 그때까지 중앙집권화되지 못했었고, 초창기에는 낙랑과 백제에 의해, 중반기에는 고구려의 강력한 정치·군사적 영향하에 놓여 있던 백두대간 남쪽 말단 지역의 부족연맹국가였다.
백두대간은 유목민들에게는 동일한 이동 공간을 제공했다. 고구려, 옥저, 동예, 신라, 말갈, 여진은 이 공간의 이동로에 줄지어 위치해 있다. 이 이동공간은 유목민의 제 물길(源流)이 되어 고구려에서 시작되어 신라로 발해로 그리고 여진으로 연결되어 2천여 년의 역사를 공유해 갔다.

황해경제권: 백제 <낙랑과 부여의 후계세력들을 이끈 大해상왕국>

기원전 13세기 에게해에서는 그리스 반도세력과 소아시아 대륙세력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다. 트로이 전쟁이다. 에게해의 해상무역 패권을 두고 벌어진 양대 세력 간의 전쟁이었다.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오디세우스는 풍랑을 만나 지중해를 가로질러 멀리 스페인의 남단까지 표류해 간다. 발칸반도, 소아시아, 크레타 섬으로 둘러싸인 에게해는 산동반도, 요동반도, 황해도 옹진반도로 둘러싸인 발해만/북부황해보다 조금 큰 바다이다. 트로이에서 스페인까지 오디세우스가 표류해 간 거리는 한반도 남단에서 베트남까지의 거리 정도가 된다.
요녕성,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으로 이어지는 중국 대륙의 동부연안지역과 대만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큐슈로 이어지는 세이난 열도 그리고 큐슈와 한반도의 서남해안으로 둘러싸인 황해/동지나해는 만년 이전 빙하기까지 모두 육지였던 곳이었다. 남북으로 길게 요하가 흘렀고 주변 강물을 받으면서 양자강과 합류하여 대만 북쪽을 통해 태평양으로 빠져나갔다. 빙하가 녹으면서 강에 바닷물이 유입되어 점차 강폭이 넓어지고 저지대에 물이 들어차 약 90m 정도 해수면이 상승하여 바다가 된 곳이다. 주기적인 계절풍과 편서풍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쿠로시오 난류가 일정하게 흐르며 황해에서 반시계방향으로 조류를 형성하는 동북아시아 내해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이 내해에 양자강, 회수, 황하, 난하, 요하, 압록강, 대동강, 예성강, 한강, 금강, 섬진강, 낙동강이 흘러들어 간다. 이 강들의 수많은 지류를 통해 내륙 깊숙이 뱃길이 열렸다. 그 옛날 해빙기 이후 점점 넓어져 가던 강의 양안에 있던 사람들이 대대손손 전하여 내려온 뱃길이었다. 이 바닷길, 뱃길을 따라 각종 물산들이 교류되었다. 그러면서 내륙의 농경문화와 남방의 해양문화 그리고 북방의 유목문화가 접촉되었다.
3세기 이래 부여의 갈래가 선비족과 고구려로부터 군사적 압박을 피해 순차적으로 요동으로, 한반도 서해안으로, 가야로, 그리고 일본으로 이주했고, 일부는 요서를 거쳐 중국 동해안지역으로 이주했다. 그곳은 오래전 동이족이 이동했던 길이었고 4세기 초엽까지 낙랑이 닦아 놓은 무역로였다. 나중에 백제라 불리는 부여계 사람들이 곳곳에 정착했다. 중국이 5호16국, 남북조란 분열시기에 빠져 있는 동안, 백제는 이 시기를 능동적으로 활용했다. 부여계 사람들의 정착지와 연대하면서 중국 해안지역 곳곳을 점령하였고, 문명 선진지역이었던 평양마저 점령(371년)하는 등, 황해/동지나해를 아우르는 해상무역 벨트를 형성, 大해상왕국으로 발전해 나간다.
4세기에서 7세기까지의 백제 해상무역 유산은 ‘제 물길(源流)’이 되어, 통일신라로, 고려로, 조선으로, 일본으로 이어지면서, 황해/동지나해 연안지역에 정치·경제적 사건을 유발한다. 그 사건들은 관련 국가들의 사서에 파편적으로 기재되었다. 그 벨트는 오늘날 동아시아 경제벨트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한민족 생활권 1: <대당전쟁 후 신라의 강역과 발해와의 공존>

분열된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隋)와 이후의 당(唐)은 西로는 토번을, 北으로는 돌궐을, 東으로는 고구려·백제·신라까지 점령하려 하였다. 돌궐을 제압한 후 당은 동서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해 나간다. 우선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 주력군(660)과 백제-왜 동맹군(663) 그리고 고구려(668)를 차례로 제압한 후 신라마저 병합하려 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유민들과 제휴하여 7년에 걸쳐 대당전쟁을 수행해 간다. 소정방을 피살했고, 두 차례의 해전(임진강 하구, 기벌포)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당의 20만 대군을 격멸(매소성전투)하여 당의 웅진도독부를 소멸시켰고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철령 이북 심양으로 축출했다(676).
장안에 수도를 둔 당은 토번과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하기에 버거웠고 멀리 떨어진 길림까지는 통치력이 채 미치지 못했다. 대당전쟁을 수행한 신라 문무왕은 당이 부여한 계림주 대도독의 칭호를 계속 유지한다. 만주원류고는 계림을 현재의 만주 길림으로 고증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발해를 건립(698)한 이래 2대 무왕은 서쪽으로 팽창하여 한때 산동을 공략했고(734), 3대 문왕은 흑수말갈을 병합하고 남쪽으로 진출하여 옛 옥저 지역(함흥)에 남경남해부를 설치한다. 패수(浿水)와 원산만을 잇는 선에서 신라와 발해의 국경이 정착되고 이후 300여 년 동안 한민족 역사에서 남북국으로 공존한다.

당 태종과 김춘추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646)고 한다. 밀약으로 평양(浿水)과 함흥(함경남도 철령)을 잇는 선의 남쪽만을 확보하기 위해 당을 끌어들였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러나 만주원류고는 7년 대당(對唐)전쟁 후(676) 신라가 백두대간 대부분을 확보한 것으로 상고한다. 요동의 철령, 장백고원, 길림을 잇는 선으로 (통일)신라의 강역을 고증하고 있다. 그리고 평양과 원산 사이의 국경선은 발해의 국경 확장으로 8세기 중반에 신라와 발해, 두 나라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획정된 것이다.

한민족 생활권 2: <발해 멸망 이후>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했다는 926년 이후, 만주원류고는 발해와 관련해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를 다수 담고 있다. 일련의 발해인들이 줄지어 고려로 이주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은 별도로 하더라도 중국이 망명 발해인을 위무했다는 기사, 1030년에 요(遼)가 마침내 발해를 평정했다는 기사 등은 926년 이후 상당 기간 요(遼)가 백두대간 북부영역을 잘 통제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10세기 전후하여 백두산에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화산폭발이 있었다는 사실이 근래 과학적 조사로 뒷받침되고 있다. 그렇다면 흘러내린 용암과 화산쇄설물로 백두대간 중심부의 경제는 오랫동안 마비되었을 것이다. 그곳의 생태계가 복원되고 금이란 새로운 국가 권력이 등장하기까지는 한 세기 이상 걸렸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고구려의 후예 발해는 소멸되었고, 나중에 만주원류고에 의해 신라의 후예라고 자리매김되는 여진의 아골타에 의해 그 강역은 금으로 승계된다. 금은 1125년 요를 멸망시키고 황하로 진입하여 회수를 경계로 남송과 대치하게 된다. 몽고에 의해 금이 멸망한 후 300여 년이 지나 여진은 길림 부근에서 애신각라 누루하치에 의해 후금으로 재탄생된다. 조선이 일본의 침략으로 곤경에 몰리던 1592년, 의주로 피난 왔던 선조에게 10여만 명에 달하는 원군 파병을 제안한다. 조선이 유린되면 길림도 곧 유린될 것이란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선조는 거절한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나 인조반정 이후, 처음에는 형제관계를, 두 번째는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한다. 그리고 중원으로 진입하여 청이란 국호로 중국대륙을 통치한다.

지식경제사회와 신유목경제권

만주원류고가 제시하고 있는 우리의 고대사 모습은 정규 학교수업을 통해 배운 것과 많이 다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만주원류고의 전 텍스트를 읽고 싶어 한다. 사실로서 믿고 싶은 역사의 편린을 찾아내는 즐거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일 수는 없다.
19세기 산업화된 열강들이 중국을 침탈해 들어가면서 조공/책봉을 핵심으로 한 중화주의 경제권은 급속히 무너졌다. 그리고 열강들은 자국 중심의 독점적인 산업경제권역을 구축해 갔다. 영국의 연연방주의, 미국의 먼로주의,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 독일의 범게르만 Levenstraum, 그리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 그것들이다. 경제권은 충돌했고 결과는 세계적 규모의 전쟁으로 나타났다. 21세기 지금은 정보화 혁명 과정에 있다. 세계는 평평해지고 급속히 지식경제사회로 전이되면서 상품 및 서비스 교류에 국경의 개념이 희박해지는 신유목경제권을 만들어 가고 있다. NAFTA, EU와 같은 거대 지역경제권이 등장했고, 중국은 3개의 역사 공정을 출발점으로 화교경제권을 넘어 자기들만의 거대 중화경제권을 구축하려 한다. 한반도가 잿더미가 된 지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에 근접하고 있는 우리는 지금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가 만주원류고에 들어가는 의미는 자못 크다 할 것이다. 과거 반세기 동안 우리는 어느 교조적인 정신사관에 매몰되었기에 성장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경제적 공간(GATT)을 충분히 활용했으며 생산요소의 효율적 투입이란 전례 있는 합리적 행동의 결과로 성장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지식경제사회는 지구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출발선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신유목경제권은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사유 양식을 요구하고 있다. 유목민족이 저술한 만주원류고에는 그 새로운 양식의 원형이 담겨 있다. 중화주의에 가려졌던 우리 역사의 제 물길이다.
 우리의 자연스런 삶의 족적들을 분절시키고 고착시킨 중화사관의 둑을 넘어 르네상스 마냥 제 물길 따라 흐를 양식이다. 그중 하나만 습득한다 하더라도 만주원류고를 끝까지 일독할 가치가 있다.

“만주족과 한민족은 사실상 같은 뿌리”<세계일보>
만주족, 발해 기반으로 금·청국 건설
금 태조 신라인… 청 시조 백두산과 연관
中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논리
  • “고구려 유장 대조영이 건국한 해동성국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만주족이 세운 금과 청국이 발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결국 만주족과 우리 한민족은 같은 뿌리라는 사실이 18세기 후반 청의 6대 고종(건륭제)이 펴낸 사서에 명확히 기록돼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이 금과 청으로부터 침략당한 사실은 치욕으로만 파악할게 아니라 같은 민족 정치지배 집단 간의 다툼으로 재조명돼야 마땅합니다. 마치 고대 삼국의 정립과 지금의 남·북이 대립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지요.”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저/이병주 감수/글모아출판/3만9000원

    남주성 역저/이병주 감수/글모아출판/3만9000원
    이쯤되면 국내 정사학계에서는 ‘궤변’이라고 몰아붙일 수도 있다. 특히 ‘동북공정’이라는 역사 왜곡 작업으로 고구려와 발해를 당의 지배를 받는 지방 정권으로 둔갑시킨 중국 사학계에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엉터리 학설’이라고 폄하할 것이다. 그러나 220여년 전 중국을 평정한 청의 황제가 펴낸 사서에는 이런 내용들이 분명히 적시돼 있다. 금과 청이 어떤 나라인가. 우리 선조들이 업신여겼던 오랑캐들이다. 오랑캐란 漢族(한족)이 주변국들을 얕보고 무시하는 용어로, 중화 사상에 젖었던 조선조 사대부들이 그대로 받아쓴 저급한 말이다. 중국의 고대 사서들이 우리 한민족을 동이족 오랑캐로 적시하는 것과 같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현직 공무원인 남주성씨(감사원 특별조사과장)가 이런 내용을 담은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를 해석, 원문과 주석을 담은 역저서를 펴냈다. ‘흠정’은 황제가 직접 편찬했다는 의미다. 이 사서는 건륭제가 자신의 조상인 만주족의 뿌리를 정립하고 한족을 제압하기 위해 한림원 학자 30여명을 동원해, 사기, 후한서, 삼국지,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의 정사와 사신들의 기록, 지리지 등을 발췌해 2년 여의 검증 작업을 거쳐 편찬한 것이다.

    ◇이 지도는 역저자가 사서를 참조해 재구성한 것으로, 고구려 흥성기와 고구려 멸망 이후의 국가간 경계가 분명히 구분돼 있다.
    글모아출판사 제공
    번역에 2년이 걸렸다고 말한 남씨는 “특히 고구려와 발해를 한족의 지방정권으로 둔갑시킨 중국의 학자들에게 역사적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입증해보이면 억지 주장을 하지 못할 것이다. 현재 중국쪽 학자들은 이 사서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고 있다. 우리 정사학계도 만주족을 연구한 기록들이 부실한 까닭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사서는 중국의 국공내전 당시 장제스 정권이 대만으로 패퇴하면서 반출해 대만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에 보관중인 ‘문연각본 사고전서’의 하나로, 남씨는 이 사서의 영인본을 입수해 상·하권 두권으로 번역했다.

    이 역저서를 감수한 중국사학회 명예회장 이병주 박사( 75· 영남대 교수)는 “만주 정권이 만든 이 사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유용한 사서이지만, 그간 우리 선배 사학자들은 일본 식민사학자들로부터 교육받은 영향으로 만주족의 자주 의식을 고취하고 있는 이 사서를 소홀히 다뤄왔다”고 밝혔다. 그 연유에 대해 이 교수는 “역사적 사실들을 왜곡해 기록한 중국 사서들이 오랜 기간 우리 학계에서 고대사 연구의 기본 사료가 되어왔다. 현 만주지역은 17세기 초까지 한족 지배 영토밖의 지역으로, 한족이 고구려, 발해 금, 청 등과의 대결에서 실패를 거듭했던 땅이다. 중국이 자국과 관련된 부분은 유·불리 잣대로 재단하고 왜곡시켰는데, 우리 사학계는 이를 토대로 하고 있다. 예컨대 후한서에는 부여와 고구려를 저급한 막말로 표기해놓았으며,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당태종 이세민이 안시성주 양만춘이 쏜 화살촉의 독으로 사망한게 아니라 감기로 목숨을 잃었다고 왜곡해놓고 있다”고 했다.

    ◇18세기 중원을 재패한 청의 영토를 나타낸 ‘대청광여도(大淸廣與圖)’. 청의 강희(康熙)제 때 학자 채방병(蔡方炳)이 그린 원도에 1785년 일본의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1717∼1801)가 교정한 중국 전도이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청 건륭제의 명으로 1777년 한림원에서 만주를 중심으로 명멸한 여러 부족의 역사, 강역, 산천, 풍속 등을 집대성했으며, 이 지도는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증빙하고 있다. 오른쪽 상단이 요동반도이고 그 아래쪽이 산동지역이다.
    글모아출판 제공
    책에는 발해와 금에 관련된 기록들이 가장 많이 언급돼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발흥한 발해는 대조영과 고구려 유민, 말갈족 등이 건국했는데, 말갈족도 고구려의 한 부족이다. 말갈은 당태종이 쳐들어왔을 때 고구려·말갈 연합군 15만여명을 동원해 안시성을 도운 사실도 나온다. 양만춘은 성 내에서, 고구려 장수 고연수는 성 밖에서 당군과 대항했다. 남씨는 “사서에서는 발해 태조 대조영이 어떻게 건국했는지와 발해와 금의 관련성을 언급해놓고 있다. 발해가 금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와 금, 조선과 청이 대립했던 것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같은 민족이면서 대립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한다. 다시 말해 정치 지배 집단간의 대립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금 태조가 신라 출신 귀족 김한보라는 내용(상권 266쪽)이 기록된 것은 처음이다. 이어 금이 몽골 침략으로 망한 이후 여진족이 청을 건국했으며 여진족의 뿌리도 말갈인이다. 책에서는 청태조 누루하치는 압록강 부근 요령성 신빈현의 건주 여진 부족장 출신인데, 누루하치의 선조는 백두산 연못에서 천사가 내려다준 과일을 먹고 태어났다는 백두산 신화를 적고 있다. 청의 발원지가 백두산이라는 것은 한민족과 같은 계통이라는 의미다.

    남씨는 “지금도 중국 사학자들은 청에 대한 반발심이 매우 강하며 금, 청과 우리 한민족간의 역사적인 연원을 부정하고 있다”면서 “만일 만주족과 한민족이 같은 종족으로 확인된다면, 지금의 동북쪽 지방에 민족의식이 싹트면서 중국이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이라는 역사 왜곡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중국의 행태는 과거 일본 침략자들이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가 한 국가로 뭉쳐야한다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란 침략 논리와 같다고 남씨는 지적한다. 그는 만주를 지배했던 일본도 이런 이유로 이 사서를 애써 외면했던 것이라며, 차제에 만주족 연구와 관련해 사학계의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