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간의 수수작용(사람간 주고받는 마음)에 비하면 너무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지난 해 11월16일 서포터즈의 눈물을 뒤로하고 프로축구 수원 삼성 감독직을 그만두고 그라운드를 떠나는 날 만났으니, 거의 1년만이었다. 4일 밤 서울 강남의 조그만 음식점에서 김호 전 감독을 만났다. 오후 6시30분에 만나기로 했는데, 장소를 정확히 찾지 못해 헤매는 바람에 기자는 6시27분에 도착했다. 그래도 기자가 빨리 도착했다 싶었는데, 음식점에 들어서니 구석 자리에 앉은 흰머리를 한 ‘노친네’ 한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김 선배(소시때 기자도 축구를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비슷한 고향이라서 선배라고 부름). “옥형 진짜 얼마만인교.. 빨리 앉으소”. 그렇게 시작된 만남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밤 12시를 넘겼다.
김호(60) 전 감독. 아마추어와 프로축구 무대에 있을 때 많은 별명이 그에게 따라다녔다. 고졸 감독, 프로축구 최다승 감독, 외로운 승부사, 만년 야당, 아마추어 최다우승 감독(9차례 우승), 프로축구 최다 우승감독(13차례), K리그 최다승 감독(188승 136무 151패)... 그는 20년간의 감독생활을 접고 지난해 11월 16일 대구 FC와의 경기를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났었다. 절대로 냉혹한 승부세계에 돌아오지 않겠다며 그의 고향인 경남 통영으로 돌아간 그는 실제로 승부세계에 돌아오지 않았다.
국내외에서 팀을 맡아달라며 섭외가 들어왔지만 뿌리쳤다. 후배들을 위해서, 후배 양성을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축구와의 인연은 끊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가 학교 후배인 진의장 통영시장과 함께 통영을 ‘축구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 수원 삼성을 떠난 이후 그는 고향에서 지난 해 겨울, 한국 중국 일본 등 3개국이 참가하는 국제축구대회를 유치했고, 현재는 매주 2∼3회 숭실대 총장의 요청으로 이 대학에서 축구기술 자문역을 해주고 있다. 그가 늘 얘기하던 ‘인생 2막’을 철저히 지켜가고,준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스승이 없었으면 오늘의 그는 없었다”
김 전 감독은 경남 통영 두룡초등학교와 통영중을 거쳐 부산 동래고에 입학, 당시 감독이었던 고 안종수씨(1977년 작고,현재 수원삼성 안기헌 단장의 아버지)를 만나면서 축구에 눈을 떴다. 중학교 시절까지 센터 포워드로 뛰었던 그에게 포지션(오른쪽 풀백)을 바꿔준 것도 안씨였고, 김호를 군제대(해병대 출신)후 제일모직으로 영입해 본격적인 축구수업을 시켰던 것도 안씨였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센터 포워드로 맹위를 떨쳤던 안씨의 지도 덕에 김호는 이후 1970년대 한국대표팀 부동의 풀백으로 9년간 태극마크를 달았다. 김 감독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안씨다. 그가 스승의 기억이 아른거리거나 보고플 때 부르는 하얀목련은 어느새 ‘18번’이 돼버렸다. ‘하얀 목련이 필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아픈 가슴 빈자리에...’.노래방에 갈때면 꼭 이노래로 마무리한다. “
"국내에서 생소한 공간축구 첫 도입했다"
김 감독은 국내에 가장 먼저 공간축구 개념을 도입한 사람이다. 공간축구는 미드필더 간격을 좁히며 허리에서부터 상대를 조여가는 ‘압박축구’를 말한다. 김 감독은 1994년 미국월드컵감독 때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공간축구를 들고 나왔다. 주위에선 포기하라고 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월드컵에서 그의 기대만큼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그가 거둔 성적은 2002년 한일월드컵 이전까진 가장 좋은 기록(2무1패)이었다.
김 감독은 이때부터 ‘외곬’, ‘야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유난히 학맥과 인맥을 중시하는 축구판에서 ‘공만 잘 차면 됐지’라는 생각에 대학행을 거부한데다 축구계의 발전을 위해서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곧은 성품 때문이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감독 제의가 있었을 때도 “대한축구협회가 변하지 않는 상황에선 맡을 수 없다”며 고사했던 게 대표적인 사례다.
“수원 삼성에 쏟았던 9년 후회없다”
김 감독은 프로감독 고별전을 하루 앞둔 지난해 11월 15일, 새벽까지 9년동안 자신을 응원해준 수원의 서포터스와 술잔을 기울였다. 한 팬은 “절대로 떠나지 말라”고 했고, 또다른 팬은 “나중에 다시 와달라”며 울먹이기도 했다. 김 감독은 “인생의 참맛을 아는 50대를 수원에서 보낸 게 자랑스럽다”고 당시 말했었다. 김 감독은 1995년 2월 재독교포인 윤성규 단장의 제의로 수원과 인연을 맺었다.
김 감독은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명문구단 10년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첫 성과는 창단 1년 만인 1996년 준우승으로 표출됐다. 그는 1998년 정규리그 정상에 오르며 프로에서 첫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2001년과 2002년 아시안 클럽선수권과 아시안슈퍼컵 2연패까지 삼성에서 무려 13번의 우승컵을 손에 넣었다.
“영원한 축구인으로 남고 싶다”
요즘도 그에게 감독 제의가 들어온다. 시즌중이라 국내 프로팀에서 오는 경우 없다고 한다. 외국팀에서 제의가 오는 경우는 드러 있다고 온다. 그러나 이제는 승부세계에 나서지 않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축구발전을 위해서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란다.
우선 그는 그라운드에 있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축구계를 완전히 뜯어고치기 위해 정몽준 회장(현재 무소속 국회의원)에게 축구발전을 위한 직언을 하기 위한 ‘지도자출신 협의회’를 만들 생각이란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요즘 접촉중이라고 했다. “내가 이바닥에서 자란 사람인데, 축구 발전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기여하게 된다는 일을 하는 그 자체가 축구인의 역할이지...”
“정몽준 회장, 반드시 제역할 해야”
”현재 한국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본프레레 감독의 축구는 어떤가요”(기자). 본프레레 감독 축구 스타일을 어떻다고 얘기하기는 이르지요. 무엇보다 대한축구협회가 달라져야 합니다. 협회가 축구를 위해서, 축구발전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정 회장을 위한 ,조직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협회가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정 회장도 달라져야 하고...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이라는 분이 FIFA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어떤 사안에 대해서 적극 대처하지 못하는데 그게 무슨 부회장이요. 정 회장이 축구가 아니라 다른 것에 더 관심을 갖는 것 같애. 그러면 안되는데.
◆김호 전 감독 프로필
▲생년월일:1944년 11월24일▲체격:177㎝, 80㎏▲가족관계:부인 최영숙(59)씨와 2남,장남은 최근 결혼 ▲종교:없음▲술·담배:소주 2병, 흡연 안함▲출신교:경남 통영 두룡초교→통영중→부산 동래고▲선수경력:제일모직(64∼68년), 국가대표(65∼73년)▲지도자 경력:동래고 감독(75년) 한일은행 감독(83∼87년) 현대호랑이 축구단 감독(88∼91년) 미국월드컵대표팀 감독(92∼94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95∼2003년)▲주요 경력:국민훈장 석류장, 98·99년 한국프로축구 감독상 수상, AFC선정 이달의 감독상(97년 8월, 99년 8월) K리그 188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