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타워]中企 외면하는 ‘비즈니스 프렌들리’
  • 할 말이 많은 듯했다. 2년간의 유학 생활.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는데 고국을 떠난 뒤 많은 것을 보고 느낀 탓일까. 그가 쏟아낸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한국 경제의 암울한 현실을 걱정하는 ‘벤처 1세대’의 고민이 배어 있었다.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안철수연구소 이사회의 안철수 의장. 이달 초 귀국 기자회견에서 그는 국내 중소·벤처기업의 현실과 대기업 위주 산업구조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평소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그이지만, 이날 발언은 그냥 흘려 듣기엔 너무나 신랄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지향한다는 새 정부를 겨냥한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국가 경제가 대기업 위주로만 가서는 위험에 취약하다. 외환위기가 그래서 온 것 아니냐”, “새 정부가 규제 철폐를 이야기하는데 규제는 철폐하되 감시 기능은 강화해야 한다. 안 그러면 ‘약육강식’의 세계가 된다”, “5년 전에는 다음, NHN, 안철수연구소 등 싹수 있는 벤처기업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국내 중소·벤처기업은 성장동력이 꺼진 지 오래다. 세계 IT(정보기술) 업계를 호령하는 애플과 구글, 야후 등 미국의 글로벌 기업은 모두 한두 명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벤처기업이었다. 지금 상태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기업이 절대 생겨날 수 없다. 위험을 감수하려는 ‘기업가정신’이 실종된 데다 의욕적으로 출발한 중소·벤처기업이 있더라도 이들을 도와주는 인프라가 취약한 탓이다.

    외환위기 직후 ‘벤처 창업 바람’이 분 적이 있지만 2∼3년을 가지 못했다. ‘중소·벤처기업에 싹이 보이지 않는다’는 안 의장의 말은 각종 수치에서 그대로 입증된다. 2005년 3941개에 달했던 IT 신설법인은 2006년 3842개, 지난해에는 3380개로 줄었다. 정부 인증을 받은 신기술 중소기업을 의미하는 IT벤처기업도 2005년 7563개에서 지난해 5945개로 크게 감소했다. 경제 규모는 커졌는지 몰라도 기초는 오히려 더욱 부실해졌다.

    주식투자에 ‘포트폴리오’ 라는 게 있다. 여러 종목에 분산 투자함으로써 한 곳에 투자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위험을 피하고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을 일컫는다. 중소·벤처기업은 대기업과 함께 우리 경제를 짜는 포트폴리오다.

    중소기업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2006년 기준 중소기업 수는 300만개로 4000여개인 대기업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종사자도 중소기업은 1000만명이 넘어 150만명인 대기업의 7배에 달한다. 일자리 창출도 중소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대기업의 일자리는 130만개가 줄었지만 중소기업은 250만개 늘어났다. 300만 중소기업이 1명씩만 더 고용해도 300만개의 일자리가 생기니 ‘중소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된다’는 말이 과언이 아닌 셈이다. 중소기업에 무게중심을 두는 경제정책이 필요한 까닭이다.

    하지만 새 정부의 경제정책을 보면 중소·벤처기업은 안중에 없는 것처럼 보여 안타깝다.

    정부는 총선이 끝나자마자 각종 경기 활성화 대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러나 정부가 추진 중인 주요 정책 가운데 상당수는 중소·벤처기업의 목줄을 조일 수 있는 것들이어서 우려된다.

    출자총액제한제도 등 대기업의 손발을 묶었던 규제를 푸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중소기업 기반이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서 규제만 없애게 되면 경제력이 대기업에 집중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안이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감세정책을 추진한다지만, 양극화가 극심한 우리나라에서는 이 역시 혜택이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에 쏠리는 역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 후퇴기에는 부자보다 빈곤층,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 더 큰 고통을 겪게 된다고 한다. 대기업이 기침만 해도 중소·벤처기업은 독감으로 신음한다. 중소·벤처기업의 고통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지향하는 정부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경제의 주춧돌에 비견되는 중소기업에 희망을 주지 못하면 국가의 미래도 없다.

    염호상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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